조명희 <낙동강>
- 최초 등록일
- 2009.10.31
- 최종 저작일
- 20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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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줄거리, 작가 소개, 작품 해설, 소설의 시대적 배경, 교과서 학습활동 및 해설
목차
<작가탐구>
*문제적 작가 조명희와 망명 배경*
*조명희의 문학세계*
<줄거리>
<핵심정리>
<구성방식>
<이해와 감상-기본편>
<이해와 감상-심화편>
<조명희, 낙동강>
본문내용
<작가탐구>
조명희는 1894년 충북 진천군 진천면 벽암리에서 태어났고, 전반기에는 호를 노적(蘆笛, 갈대잎을 말아서 만든 피리, 갈피리라는 뜻)으로, 1923년 후반기부터 포석이란 필명을 사용했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양반 가문으로 권력과 부를 누렸으나 포석의 유년 시절 불과 10여 년 사이에 몰락의 길로 접어들어 서울 중앙고보 다닐 때는 북경사관학교에 가겠다고 여비도 없이 가출했다가 중형에게 평양 부근에서 잡혀 고향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다시 동경 유학을 계획하며 여비 마련을 위해 고생하지만 결국 친구의 도움으로 겨우 1919년 겨울 동경 소재 동양대학 인도철학부 윤리학과에 적을 두게 된다. 이때도 역시 학비 문제와 생활난으로 시달리고 그 사이에 포석은 1907년 13세의 어린 나이에 네 살 위의 여흥 민씨와 결혼,
워낙 빈궁한 생활로 부부 간에 애틋함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포석의 사람됨을 보면 그 생김이 심중하여 말이 적고 늘 우울하였으며 행동 또한 둔하였다. 다작하지 않았고 또 기교도 극히 없으며 그러나 꾸밈이 없는 대신 솔직하고 침착하고 사려 많으며, ‘후배를 키우며 고무하는 선배’로서 ‘다심한 길라잡이’ 역할을 했다. ‘아무리 급박한 경우를 만난다 하더라도 언제나 태고인하도록 유장하고 여유 있어서 그만 보면 자연 맘이 훈훈해지면서 일이 제치고 나갈 구멍이 내다보이곤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부드럽고도 강한 문학상의 전략 전술’을 통해 ‘보다 많이 부르조아 출판물들에 등장’시켜 문화 말살정책과 살인적인 검열제도 아래에서 어느 정도 살려 갈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서 다작하지 않았다는 것은 원고료 수입과 연결되어 그만큼 생활 대책이 힘들었다는 의미일 수 있고, 아무리 급박한 경우에도 여유가 있었다는 점은 가정에서는 속 답답한 구석이 많을 수 있다. “드러누워 오느냐 가느냐는 말도 없이 함구불언으로 책만 보고” “그만치 어려우면서도 원고를 들고 가서 팔려하지도 않고 뉘게 가서 돈 한 푼 꾸어달라는 법도 없었던 그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말하자면 문학과 사회생활은 바람직하게 운용하는데 가정 생활은 혐오스러울 정도라면 그러한 차이에서 오는 갈등은 대단했으리라 쉽게 짐작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