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성통해에 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9.06.09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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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세진의 사성통해에 대하여 분석한 글입니다.
목차
1. 최세진(?∼1542)의 생애(生涯)
▷▶학술 활동
▷▶ 업적 및 평가
2. 사성통해
▷▶사성통해 서
3. 사성통해로 알아보기
▷▶사성통해로 본 무궁화
【참고문헌】
본문내용
1. 최세진(?∼1542)의 생애(生涯)
조선 중기 때의 어학자. 서울 출생. 자는 공서(公瑞). 본관은 괴산(槐山)이다. 사역원정(司譯院正) 정발(正潑)의 아들이다. 처음 역과(譯科)에 합격하고 중인 계급으로 과거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아 1503년(연산군 9) 문과에 급제했으나 갑자사화(1504) 때 처형된 이세좌(李世佐)에게 추천을 받은 일이 있다는 이유로 한 때 파방(罷榜)되었다가 중국 사신의 통역을 잘한 공으로 파방이 취소되었다. 그 이후로도 사역원의 역관(譯官)으로 명나라에 다닐 때 사무역(私貿易)을 했다는 이유로 1509년(중종 4)에 파면되고 또 내섬시정으로 있을 때 비(婢)인 천비(天非)를 궁중에 출입시켰다는 이유로 예빈시 부정(禮賓寺副正)으로 강등되었으며 1518년 주청사(奏請使)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갔을 때 명의 조선에 대한 채녀(採女) 정보를 입수하여 본국에 알린 것이 정보 누설죄로 논란되어 좌의정 남 곤의 변호로 겨우 무사하게 되는 등 곡절이 있었으나 승진을 계속, 1524년 군자감정(軍資監正), 1530년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거쳐 그 뒤 오위장(五衛將), 상호군(上護軍), 1539년 승문원 제조(承文院提調), 1541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능통한 중국어와 이문실력 때문에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을 담당하여 왕의 신임을 받았던 그는 중국어, 운서(韻書) 연구의 대가였으며 이문(吏文)에 있어서도 독보적인 당대 최고의 석학으로서 1517년 내섬시 부정(內贍寺副正으)로 참교(參校), 한학 교수(漢學敎授)를 겸하고 있을 때 <사성통해>를 완성하고 1524년 <친영의주>, <책빈의주>를 언해한 것을 비롯해서 1527년 <훈몽자회>를 완성, 그 범례에서 한글 자모음의 명명 및 순서와 받침을 정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효경>, <여훈>, <노걸대>, <박통사>를 한글로 번역, 국어학발달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또 당시 사대문서의 작성과 사신의 내방에 중요한 역할을 담
참고 자료
『사성통해의 음운학적 연구』 이강로 著
『사성통해연구』 강신항 著
『국어학사의 기본이해』 김민수 著
『우리말연구사』 김형주 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