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3.1운동
- 최초 등록일
- 2001.06.13
- 최종 저작일
- 200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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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자료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네요..^^
목차
1) 사전 준비와 조직
2)3월 8일 의거
3) 2차 의거
4) 경산 시위의 실패
5) 동화사 학립 학생들의 시위
6) 계속된 학생들의 활약
본문내용
대구 지방의 3·1의거는 1919년 2월 중순부터 분위기가 익어 갔다. 때마침 상해에서 돌아온 김순애와 백남규는 대구 종교계의 지도자인 백남채(남산교회 장로), 이만집(남성교회 목사), 홍주일(천도교 경북 교구장)등과 자리를 함께 하여 시국을 논하였다. 파리 회의며 일본 유학생의 독립선언등을 이야기하고 우리 겨레가 떨치고 일어설 때가 왔다고 뜻을 모았다.
2월 26일, 이갑성이 이만집을 찾아와 국내외 정세를 설명한 후 서울에서 진행되고 있는 거사 계획을 알려 주었다. 아울러 일본 정부에 보낼 독립청원서에 대구 대표로서 서명해 줄 것을 부탁하였다. 이 때 이만집은 좀더 시간을 두고 관망해 보자는 뜻을 보이었다. 25일, 이갑성은 서울로 돌아가고 26일,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교 학생 김문진을 이만집에게 보내어 결심을 촉구하였다.
3월 1일, 서울에서 의거가 시작되고 평양과 각지로 번져 가자 대구의 뜻 있는 인사들도 거사를 다짐하게 되었다. 이갑성이 보낸 세브란스 의학 전문학생 이용상이 독립선언서 200매를 가지고 3월 2일 이만집을 찾아왔다. 이로써 대구의 유지들은 구체적인 의거 계획을 세우고 조직을 하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