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시대 여성의 모습 - 기록과 유적으로 본 고대 여성의 역할 및 지위
- 최초 등록일
- 2018.10.01
- 최종 저작일
- 201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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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건국신화에 나타난 여성상
3. 삼국시대 여성의 사회적 지위
4. 유물을 통해 본 여성의 역할
5. 맺음말
6. 참고자료
본문내용
1. 머리말
우리나라의 여성들은 현재 예술, 학술, 정치, 경제 등 각계에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다. 이러한 여성들의 활약상을 보면 불과 반세기 전까지 한국의 여성들이 개성이나 역량(力量)을 펼칠 기회를 갖지 못한 채 소리 없이 가정에서 종속적인 삶을 이어왔다는 사실을 짐작하기 어려울 것이다. 법적 권리나 사회적 지위로 본다면 과거 서양의 여성들도 우리와 별로 다를 바 없는 위치에 있었기는 마찬가지다. 그러나 특히 유교(儒敎)를 국시(國是)로 삼았던 조선시대에는 여인들이 가정, 그것도 집안의 안채라는 제한된 공간에서 현모양처(賢母良妻)의 역할 이외에는 별다른 사회적 또는 전문적 활동을 할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였다. 15세기 중엽에 편찬된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여인들의 외출을 제한하며 이를 어기면 벌을 주는 조항이 포함되었으니 가히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중 략>
2. 건국신화에 나타난 여성상
고구려 문헌상 최초의 여성은 고구려 건국신화에 등장하는 하백의 딸 유화(柳花)이다. 유화는 고구려판 웅녀라고 불리는데, 그 가장 큰 이유는 건국신화에서 보여주는 유화의 행동과 지위 때문이다. 유화는 해모수에게 유인 당해 강제로 동침하게 되고 아버지 하백에 의해 내려진 추방의 명령을 말없이 감수하는 순종적인 여성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해모수와의 관계에서는 물론이고 금와왕과의 관계에서도 동등한 지위나 역할을 찾아 볼 수 없다. 단지 유화가 수동적이고 체념적인 태도에서 주몽을 낳은 후 자식을 보호하고 양육하는 적극적인 어머니의 모습으로 변하는 것만 볼 수 있다. 이러한 유화의 역할이 고구려 건국사업에서 시조모(始祖母)로서 두드러지는 것이라 할 수는 있지만 왕과 더불어서 건국사업에 힘쓴다든지 자신이 직접 정치에 참여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유화에게서 찾을 수 있는 역할은 웅녀에게서 발견된 어머니 모습 그대로이며 이후 고구려 사회가 모자신(母子神)인 유화와 주몽을 모셨다는 점에서 고구려는 웅녀 의식을 계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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