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대왕대비ㆍ왕대비 尊號儀禮의 정비과정과 用樂 변천

저작시기 2012.12 |등록일 2018.03.15 | 최종수정일 2019.02.12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33페이지 | 가격 7,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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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국악학회 수록지정보 : 한국음악연구 / 52권 / 5 ~ 37 페이지
저자명 : 김종수

없음

한국어 초록

유교를 국시(國是)로 삼은 조선에서는 예와 악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것을 이상향으로 삼았으며, 이는 의례(儀禮)라는 형식으로 표현되었다. 의례는 그 시대에서 추구하는 정신을 상징적인 행위로 표현한 것이므로, 의례의 변천은 그 시대정신을 반영하기 마련이다. 본고는 왕대비(대왕대비)에게 올린 존호의례의 정비 과정과 용악(用樂)의 변천을 살핀 글이다. 경종대(1720~1724)까지는 전왕(前王)의 선양(禪讓) 또는 승하로 인해 사왕(嗣王)이 즉위함에게 따라, 모후(母后)와 조모(祖母)를 각각 왕대비와 대왕대비로 존숭(尊崇)하면서 존호(尊號)를 올린 경우가 대부분인데, 영조대(1724~1776) 이후에는 왕위 계승과 관련하여 존호를 올린 것 외에 왕대비(대왕대비)의 회갑․칠순․팔순, 왕세자의 탄생과 책봉, 선왕의 추모 등, 기타 다른 계기로도 왕대비(대왕대비)에게 빈번히 존호를 올렸다. 왕대비(대왕대비) 존호의례는 책(冊)․보(寶)를 제작하여 외정전(外正殿)으로 받들고 오는 내입의(內入儀), 외정전에서 왕이 책과 보를 전하면 이를 왕대비(대왕대비)가 납신 곳으로 받들고 가는 친전의(親傳儀), 왕대비(대왕대비) 앞에서 책과 보를 읽고 바치는 독책보의(讀冊寶儀)로 구성된다. 조선초기에는 외정전에서 왕이 조정관원에게 책(冊)․보(寶)를 전했고, 조정관원이 왕대비(대왕대비)가 납신 곳으로 가서, 직접 책․보를 읽고 왕대비(대왕대비)에게 바쳤다. 영조대 중반까지 계속 왕이 조정관원에게 책․보를 전하다가, 1756년(영조 32) 이후부터는 왕이 내관(內官)인 상전(尙傳)에게 전하는 변화가 있었으며, 명종대(1545~1567) 무렵 이후부터는 조정관원이 아니라 여관(女官)이 책․보를 읽고 바치는 변화가 있었다. 즉, 명종대 무렵 이후 왕이 외정전에서 조정관원에게 책․보를 전하면, 조정관원이 내정전(內正殿)으로 받들고 가서 상전에게 전하고, 상전은 또다시 여관에게 전하여, 여관이 왕대비(대왕대비) 앞에서 책․보를 읽고 바쳤는데, 1756년(영조 32) 이후는 왕이 외정전에서 상전에게 전하면, 상전이 내정전으로 받들고 가서 여관에게 전하여, 여관이 책보를 읽고 바쳤으니, 의례는 내외(內外)를 엄격히 구분하면서 단출하게 하는 쪽으로 정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친전의를 행한 외정전에서 1418년(세종 즉위)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지만, 늦어도 1475년(성종 6)부터는 헌가(軒架)를 진설하여 음악을 연주했고, 늦어도 1418년 이후 외정전에서 책․보를 받들고 왕대비(대왕대비)가 납신 곳으로 가는 동안 전부고취(前部鼓吹)를 연주했다. 이는 조선조말까지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독책보의에서의 용악은 여러 차례 변화가 있었다. 조정관원이 왕대비(대왕대비) 앞에서 책․보를 읽고 바친 조선 초기에는 편전(便殿)에서 악공이 음악을 연주했고, 여관이 읽고 바친 명종대(1545~1567) 무렵부터는 내정전에서 여악(女樂)이 음악을 연주했다. 그런데 인조반정 이후 장악원 소속의 여악을 폐지함에 따라 자연히 1623년 이후에는 내정전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으며, 이는 영조대(1724~1776)까지 지속되었다. 정조대(1776~1800)에 들어와 독책보의에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게 되면서, 1784년(정조 8)에는 고사(瞽師)로 하여금 내정전에서 악기를 연주하게 하고, 여령으로 하여금 악장을 노래하게 했다. 그러나 왕이 중심이 되는 조정 의식에서 일상적으로 음악을 담당하는 악공과 달리, 여성이 참석하는 의례에서 음악을 담당하는 여령과 고사는 특별히 준비해야 하므로, 행사를 크게 벌이지 않으려는 의도로 왕대비가 이를 사양하는 바람에 특교(特敎)로 정지하는 경우가 흔했다. 그러다가 1848년(헌종 7)부터는 내정전 문 밖의 계상(階上)과 뜰에 등가(登歌)와 헌가를 진설하고, 준비하기 번거로운 여령과 고사 대신 악공으로 하여금 연주하게 함으로써, 내외하는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음악을 성대하게 갖추었다. 한편 1778년(정조 2)에 정조가 ‘국상(國喪)을 마쳤다고 해서 차마 바로 음악을 들을 수 없으니, 담제(禫祭)를 지낸 달에는 악기를 진설만 하고 연주하지 말라’고 명함에 따라, 1778년 이후 부묘(祔廟)로 인해 올리는 존호의례에서는, 외정전의 헌가 및 내정전으로 가는 길의 고취를 진설만하고 연주하지 않았으며, 내정전에는 아예 악기를 진설하지 않음으로써, 친애의 애틋한 마음을 표현하였다.

영어 초록

Rituals symbolize the times’ spirit, so their trends reflect the times’ spirit. The queen dowager eulogistic title offering ritual was performed as follows. The Book and Seal were produced, and brought to the external court, and this process was dubbed Naebibui(內入儀); at the external court, the king delivered the Book and Seal to the queen dowager, who took to the dedication place, and this process was dubbed Chinjeonui(親傳儀); and the Book and Seal were read to the queen dowager and this process dubbed Dokchaekboui(讀冊寶儀). In the early Joseon period, the king delivered the Book and Seal to the official at the external court. The official went to the queen dowager’s place, read them and offered them to her. Until the middle of King Yeongjo’s reign (1724~1776), the king continued to deliver the Book and Seal to the official. After 1756 (32nd year of King Yeongjo’s reign), however, the king delivered them to the eunuch. After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1545~1567), the female official, instead of the male official, read the Book and Seal, and offered them to the queen dowager. After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the king delivered the Book and Seal to the official at the outer court, who took them to the inner court, where he delivered them to the eunuch. The eunuch delivered them to the female official, who read them and offered them to the queen dowager. After 1756 (32nd year of King Yeongjo’s reign), however, the king delivered them to the eunuch at the external court, who took them to the inner court, where he delivered them to the female official. The female official read the Book and Seal and offered them to the queen dowager. As such, the ritual was refined in such a way that males and females were made to strictly avoid facing each other with the ritual being streamlined. From the early Joseon period, the Chinjeonui ritual(親傳儀) was performed at the external court, while the Book and Seal were taken to the queen dowager’s place, music was played. This ritual continued by the end of Joseon period. However, in the Dokchaekboui ritual(讀冊寶儀), the ritual music underwent several changes. In the early Joseon period when the official read the Book and Seal before the queen dowager and offered them to her, the male musician played music. From the reign of King Myeongjong (1545~1567) when the female read them and offered them to the queen dowager, the female musician played. However, after the King Injo Rebellion event, the system of female musicians operating in Seoul was abolished. Thus, after 1623, in the Dokchaekboui ritual, music was not played, and this continued until the reign of King Yeongjo (1724~1776).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1776~1800), playing music at the Dokchaekboui ritual was regarded as natural. So, in 1784 (8th year of King Jeongjo), a blind musician was made to play the instrument, and a female musician was made to sing the song. However, unlike the male musician at various court rituals officiated by the king, rituals in which the female musician and royal women participated had to be specially prepared, so the queen dowager declined to do so to avoid such formalities by issuing a special order. From 1848 (7th year of King Heonjong’s reign), male musicians, instead of blind musicians who were difficult to get, were used on condition that they should perform music outside the door, thus meeting the requirement of avoiding face to face meeting between males and females. In 1778 (second year of King Jeongjo’s reign), King Jeongjo was not in a position to listen music, even though he finished the state funeral. So, he ordered that the instrument should only be provided without being played in the month when the ancestral ritual was held. Thus, after 1778, the eulogistic posthumous title offering rituals did not entail music performance, expressing the sorrowful hear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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