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1. 들어가며
2. 측근세력 조직
3. 개혁교서 반포
4. 반원개혁 단행
5. 나가며: 결론을 대신하여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주지하다시피 공민왕의 반원 개혁은 혁신적인 것으로 평가받는다. 공민왕은 ‘반원정책’을 단행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 반원개혁은 1356년 5월 그가 기철 일파를 궁궐로 소환해 처단하고, 고려에 설치된 원과 관련 행정단위(이문소 · 만부호)들을 해체한 후, 그를 원에 통보했던 일련의 정황을 지칭한다. 즉위한지 얼마 안 되어서 원과 깊은 연구를 지녔던 특정 세력을 축출하고, 관제개편, 호복 · 변발을 중단해 고려의 구제를 복원했다. 공민왕의 이러한 당시 조치들은 ‘원 간섭기’를 종식시킨 개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본고는 공민왕 정치개혁의 과정을 측근 세력의 조직, 개혁 교서 반포, 반원 개혁 단행이라는 세 가지의 범박한 과정으로 분류하고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를 살펴본 후, 각 부분의 유기적 연결성에 대해 논할 것이다.
2. 측근세력 조직
공민왕은 1330년(충숙왕 17) 충숙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원의 부마국이었던 고려는 관례에 따라 원 황실의 공주 3명을 정식 왕비로 맞아들였지만 모두 사망하고 남양 홍씨 홍규(洪奎)의 딸인 덕비(德妃) 홍 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이 태어났다. 이 두 아들이 장자인 충혜왕과 차자인 공민왕이었다.
공민왕의 원래 이름은 기(祺), 즉위 후 전(顓)이라고 개명했다. 몽고명은 빠이앤티무르(伯顔帖木兒)였다. 그는 출생 후 왕자로 강릉대군(江陵大君)에 봉하였으나 충숙왕이 죽고 15살 위인 형(충혜왕)이 1341년 즉위하자, 1년 뒤 12살이 된 해에 원의 명령으로 원의 대도(大都)에 들어갔다. 원은 관례대로 왕과 가까운 혈족을 볼모(질자,質子)로 불러 들였던 것이다. 충혜왕의 장자 흔(충목왕)이 5세 였던 것에 비해 왕기는 ‘大 元子(대 원자)’라고 일컬어진 것으로만 보아도 왕기가 왕위승계권자로 인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원도 연경에 10여년 간 머물면서 두 번의 왕위 승계의 기회를 놓치게 되지만 결국 노국공주와 혼인하면서 왕위에 올랐다.
참고 자료
高麗史
拙藁千百 (崔瀣)
太古和尙語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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