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재단(American Korean Foundation), 냉전과 한미 하방연대

저작시기 2016.11 |등록일 2017.02.16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55페이지 | 가격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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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수록지정보 : 한국학연구 / 43권
저자명 : 이봉범

목차

[국문초록]
1. 리틀 타이거와 한미재단 그리고 냉전
2. 한미재단의 위상과 주요 사업
3. 4-H클럽 지원 사업, 미국적 모델 이식과 종속/발전의 이중주
4. 한미재단에 대한 폭넓은 관심을 제안하며-결론을 대신하여
참고문헌

한국어 초록

한미재단은 냉전기 한미관계의 동태적 변모를 잘 드러내주는 미국의 민간재단이다. 비정치, 비영리, 비종교를 표방한 가운데 아이젠하워/이승만정부의 정권적 이해가 부합된 냉전정책의 산물로 1952년 8월 백악관에서 발족된 한미재단은 25년(1952~76년) 동안 약 5천만 달러를 한국에 원조함으로써 한국의 전후재건과 근대화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리틀 타이거들을 대상으로 한 뉴스보이콘테스트는 한미양국 정부의 국내 · 외적 냉전정책이 한미재단을 매개로 어떻게 결합하여 선전전으로 활용되었는지를 드러내준 전형적인 사례이다. 한미재단은 아시아재단, 포드재단, 록펠러재단 등 미국의 유력한 민간재단의 한국원조와 여러 점에서 구별되는 특징을 보여준다. 첫째, 냉전기 한미관계의 특수성이 집중적으로 반영된 태생적 본질로 인해 조직 구성과 원조사업 전반이 한미관계의 변동에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점이 한미 간 갈등이 고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한미재단의 사업을 촉진시키는 역설적 결과를 초치한 가운데 한국원조가 성공적으로 결실될 수 있는 최적의 조건으로 작용했다. 둘째, 한국정부와의 긴밀한 협력관계 속에 원조사업이 실행됨으로써 반관반민의 성격을 농후한 지녔으되 원조사업의 유효적절성을 제고시킬 수 있었다. 셋째, 공적원조뿐만 아니라 타 민간재단과의 다층적 협력채널을 바탕으로 대한원조의 선택/집중의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넷째, 원조의 규모와 사업 영역이 방대했다. 그중 보건의료, 4-H클럽, 지역사회개발, 교육, 사회복지, 주택 등 6개 분야가 핵심프로젝트였다. 다섯째, 한국현지화에 심혈을 기울여 원조의 효과와 영향력을 배가시켰다. 특히 1953년 두 차례의 사절단 파견과 그 결과보고서를 바탕으로 대한원조기본계획을 수립하고 이에 입각한 장기지속적인 원조를 시행함으로써 한미연대의 새로운 차원을 개척하기에 이른다. 여섯째, 미국에 대한 긍정적 이미지제고에 다대한 기여를 하면서 민간차원의 양국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 동시에 공적 원조를 둘러싼 양국의 첨예한 갈등을 완화시키는데도 이바지했다. 이 같은 냉전기 한미 하방연대(下方連帶)의 긍정적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업이 4-H지원 사업이다. 한미재단은 1953~79년 막대한 재정 및 기술 원조뿐만 아니라 미국적 민주주의를 전파함으로써 4-H클럽을 농촌지역사회개발과 농촌근대화의 전위대가 되도록 만들었다. 특히 1964년 소사4-H훈련농장설립을 계기로 강화된 농촌지도훈련프로그램이 미국적 가치와 이념의 유력한 전파통로였다. 한국4-H클럽운동은 비자생성과 비자주성을 지녔으나, 미국적 모델이 이식된 가운데 자생성을 추동했으며 한미재단을 주축으로 한국정부, 미국4-H클럽의 유기적인 협력관계로 한국4-H클럽이 단기간에 안정적으로 정착될 수 있었다. 1960년대 후반 세계2위 규모로 성장한 4-H클럽은 조직적, 인적 차원에서 1970년대 새마을운동의 중요한 물질적 기반이 되었다. 한미재단의 4-H클럽지원은 (절차적)민주주의의 전파와 확산에 상당한 기여를 했으며 ‘소리 없는’ 미국화를 추동했다. 그러나 전근대적 사고방식과 가부장적 권위주의가 온존한 당대 한국농촌사회의 구조적 조건과 농촌사회의 점진적 붕괴에 따른 4-H클럽의 자기확장성과 인적재생산메커니즘이 봉쇄됨으로써 민주주의 전파 및 미국화가 농촌사회 전체로 확산될 수 없었다. 엘리트집단보다는 뭇 대중들과 교집합을 형성하며 장기지속적인 대한원조를 시행한 한미재단은 냉전기 한미관계의 복잡성과 공적․비공식적 대한원조의 상호결합 관계를 파악하는데 유리한 존재이다.

영어 초록

It can be revealed by focusing American Korean Foundation(AKF, American private foundation) that dynamic movements of relations between Korea and U.S. during the Cold War. In August 1952, claiming to be nonprofit, nonpolitical, non-religious, AKF started at the White House, which was a result of Cold War policies that were relevant to interests of Eisenhower and Syngman Rhee administration. AKF contributed $50m to South Korea from 1952 to 1976 and helped its postwar rehabilitation and modernization. It can be explained by typical example of the news-boy contest among ‘Little Tigers’ that the Cold War policies of Korea and U.S. government with AKF were used in propaganda war. AKF is distinguished from other aid or assistance by other American regnant private foundations in several points. First, because of the inherent feature of AKF that the Cold War Korea-U.S. relations were intensively reflected, the composition of organization and aid projects of AKF were directly influenced by changes in the relations. Second, despite its semi-governmental management, AKF could improve effectiveness of assistant projects with close cooperation to Korean administration. Third, AKF was able to use strategy of choice and concentration to Korea that was based on assistance by cooperation with other private foundations as well as the official aid. Fourth, the fields of assistant projects by AKF were vast in scale. Especially six core projects by AKF were Health care medical services, 4-H agricultural activities, Community development projects, Education programs, Social welfare programs, Housing projects. Fifth, AKF devoted itself into localization in Korea, as the result of that, the effect and influence of its assistance increased. Sixth, AKF helped America to improve its image, and to cement friendly relationship between Korea and U.S. in private sector. At the same time AKF also contributed to toning the conflict about official aid between Korea and U.S. down. It can be shown by the supporting 4-H club project that such as above positive aspects of downward solidarity of Korea-U.S. during the Cold War. AKF made 4-H club become the spearhead of rural community development and rural modernization during 1953~1979 not only by huge economic and technological assistance but also by spreading American democracy. Korean 4-H club had not had autonomy, but after importing American model, became autonomous and growed as second largest scale worldwide in late 1960s. 4-H club formed a material basis of Saemaeul Movement in 1970s with its organization and human resources. Supporting 4-H club project by AKF contribute to spreading procedural democracy and ‘soundless’ Americanization. However, spreading democracy and Americanization in Korea were not success because of structural condition of Korean rural community where there were premodern ways of thinking and patriarchal authoritarianism in that times. Korean rural communities, in addition, declined gradually and 4-H club also could not maintain its self-expandability and reproduction of human resour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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