森鷗外と論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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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연구소 수록지정보 : 일본연구 / 15권
저자명 : 윤명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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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초록

모리오가이(森鷗外)는 대대로 지방영주의 전의(典醫)인 가문에서 태어났고, 그의 활달한 성격은 모계의 훈육을 받았다. 유년시 명치유신은 가업의 쇠퇴와 근대화를 향한 새 물결에 그를 직면하게 했다. 가정적으로는 가운의 부흥과 사회적으로는 서구 열강의 대열에 낄 수 있는 기반을 형성해야 할 막중한 사명을 젊어지게 된다. 이런 가운데 동경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그는 독일유학의 꿈을 실현시킬 방편으로 육군입대를 지망, 마침내 독일유학길에 오른다. 유학중의 그는 생득의 총명함과 갈고 닦은 어학실력, 그리고 친화력있는 대인관계의 태도를 갖추어 알차고 거침없는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육군성 프로그램에 따라 독일위생학을 연구하고, 또 시간을 내어 독일군의관과의 사교, 독일문학의 탐독, 미학철학에 심취, 밤에는 연극관람 등 그의 유학말기의 베를린시대를 제외하고는 보람찬 유학생활을 하게 된다.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그의 눈앞의 일본실상은 근대화의 제도적 골격은 어느 정도 갖추어가고 있었으나, 그를 뒷받침 할 정신적 성숙은 요원한 상태였다. 그가 전공했던 군의계(軍醫界)는 물론 문학계에서도 서구문학의 도입단계였고, 기타 사회 전반적으로는 그가 유학한 독일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유치하였다. 여기서 그의 사회 엘리트로서의 사명감과 원래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타고난 기질은 각 분야에 걸쳐 전투적 계몽비판 및 논쟁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중 몇 가지를 예시함으로서 그 논쟁내용과 그 논쟁을 통한 그의 인생관의 변이를 고찰하고자 한다. 그의 유학중 독일인 나우만과 신문지상에 논쟁을 하게 된다. 나우만은 지질학자로서 명치정부의 외인학자 초청계획에 따라 일본생활 10여년의 지일가(知日家)였다. 신문논문은 그가 지질학자로서 일본전국을 답사한 기록으로서 풍광의 아름다움과 지방오지에서 보고 느낀 말하자면 여행기였다. 거기엔 외국인으로서의 오해나 이해가 부족한 점은 분명히 있었으나 일본을 악평하려는 의도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후진국 일본을 보호하려는 청년 오가이는 여기에 과민반응을 보여 논쟁을 벌였던 것이다. 다만 서구문명의 도입에 성급한 일본이 연출하는 맹목적 모방에서 오는 불합리한 점을 지적하게 되는데 이점에서는 오가이 자신 또한 수긍하게 된다. 다음으로 닝게츠(忍月)와의 논쟁은 오가이가 독일유학기념으로 쓴 소설 『舞姬』에 관한 것이었다. 이 소설은 근대소설의 시범작으로서 문장의 참신함과 격조 그리고 당시 관료사회구조에 대한 비판 등 다각적으로 걸작이었다. 닝게츠는 이 소설의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몇 가지를 질문형식으로 비평하게 되는데 특기할 것은 연애냐 功名이냐 하는데 있다. 즉 오가이는 주인공으로 하여금 연애를 버리고 공명을 취하게 하는데 닝게츠는 공명을 버리고 연애를 취해야 한다는 작중인물의 윤리도덕적 입장에서 압박하였다. 닝게츠가 독자의 입장에서는 모르나 비평가로서는 이 주장이 적당치 않다고 본다. 더욱 오가이는 후일 소설 『雁』에서도 사나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 어떤 여인의 존재도 용인하지 않는 여성관을 보여줌으로서 더욱 공허할 따름이다. 닝게츠는 오가이의 『우타카타노키(うたかたの記)』에 대한 비평을 제기한다. 그런데 이작품에 대한 비평은 닝게츠 외에도 여러 가지 비평이 나오는데 오가이는 닝게츠에 대해서만 그 반론을 제기한다. 닝게츠의 문학적 입장은 렛싱의 미학적 견식을 기저로 하고 있고, 오가이의 비평기준은 19세기 독일미학, 특히 할트만의 심미학을 표준으로 각기 비평의 논거로 하게 된다. 오가이는 닝게츠가 사용한 문장, 외형, 내면이란 용어의 내용을 분석, 그 애매함을 추구하였다. 그리고 이들 양자의 시각차는 幽玄에 대한 정의차인데 이 논쟁은 그후 그 이상 발전을 보지 못하고 막을 내린다. 다음의 논쟁은 오가이가 문예비평에 있어서 쇼요(逍遙)의 記實주의적 태도나 방법에 동의하지 못한데서 비롯되었다. 즉, 양자의 견해차는 우주의 절대적 실재로서의 이념에 대한 이해의 차이였다. 이 논쟁은 용어개념에 대한 오해로 논의가 겉돈 것 같은 경향이었으나 총체적으로 문학에 대한 미학적 고찰은 한 문학작품의 가치와 형태상의 문제, 문학비평 태도, 방법 등에는 많은 발전을 보게 된다. 끝으로 의사(醫事)논쟁인데 당시 의학계 최고권위인 醫事잡지 『東京醫事新誌』 주필로 영입된 오가이가 제1회 일본의학회 개최를 둘러싸고 상관 이시구로(石黑)를 비롯한 을유(乙酉)회원과의 갈등이었다. 오가이는 학회란 단순한 지식교환을 위한 친목회가 아닌 실험과 관찰에 의한 업적을 중시하고, 이러한 점을 새로운 기준으로 하여 학회가 설립되어야 할 필요성과 근대적인 학문확립을 주장하였다. 이와같은 견해차는 오가이의 주필직 해임으로 이어지고 오가이는 개인잡지 『衡生新誌』 등을 창간, 그가 지향하는 의사 근대화에 도전하게 된다. 오가이의 주장은 원론적으로 수긍되지만 전국 한방의를 규합, 서양의학을 발전시키려는 상관 이시구로 등의 주장 또한 타당한 것이었다. 더욱이 전국 4만에 이르는 일반 개업의와 한방의를 적으로 하는 오가이의 정치력 부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고, 결국 오가이는 이들 공동체에 의해 묵살되었고, 사실상 오가이는 완패하게 된다. 이 논쟁은 오가이가 청일전쟁에 종군함으로서 종지부를 찍게 된다. 終戰후 귀국한 오가이는 젊은 날의 전투적 논쟁태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즉 對쇼요논쟁에서 할트만의 형이상 미학을 정면으로 내걸었던 그가 쇼요의 상식적인 질의를 받고서 할트만 미학만으로 간단하게 설복시킬 수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하여 오가이는 자신도 철저히 記實을 불가불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의사논쟁에서 군의계 선후배와의 대립은 그 후 인사이동에서 고구라(小倉)좌천이라는 역경에 조우하게 되어 자신의 인생관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더욱이 그의 지성이 기본적으로 整理的 知性이 아니었다는 태생과 함께 그가 독자론(獨自論) 전개에 뭔지 한계를 느끼고, 본연의 오가이소설이 역사소설로 전이되었고, 諦念, 怨念의 문학으로 전이해 간 것은 필연적 결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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