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더우드의 고아원 사업에 대하여(1886-1897)

저작시기 2016.03 |등록일 2016.04.16 | 최종수정일 2018.11.14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39페이지 | 가격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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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수록지정보 : 한국기독교와 역사
저자명 : 황미숙

목차

Ⅰ. 머리말
Ⅱ. 고아원 설립과정
Ⅲ. 고아원 운영
Ⅳ. 고아원 사업의 변화
Ⅴ. 북장로교 선교정책과 고아원학교 폐지
Ⅵ. 맺음말
참고문헌
한글초록
Abstract

한국어 초록

언더우드는 곤궁한 처지에 있는 집 없는 아이들과 사생아들을 위하여 옷을 입혀주고 음식을 먹여주는 고아원 사업을 통하여 ‘복음전파’를 달성하고자 하였고 “언젠가 한국에 대학교와 신학교를 세워 기독청년들을 키우겠다”는 소망을 담고 한국의 기독청년들을 길러내고자 하였다. 조선정부는 이러한 고아원 사업을 복지사업의 의미로 선교사들의 제안을 수용하였다. 언더우드는 독자적으로 건물을 마련하여 한 명의 소년을 데리고 1886년 5월 11일 고아원 사업을 시작하였다.
초기 고아원학당의 운영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의식주를 해결해 주었으며, 영어, 한문, 한글을 가르쳤다. 교사는 선교사들과 조선인이었다. 어려움도 있었다. 한국인들의 인식 부족으로 인한 오해, 재정적인 어려움, 그리고 고아원 운영을 놓고 발생하는 선교사들 간의 갈등이 난제였다. 무엇보다도 재정적인 어려움이 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아원학당 사업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언더우드와 헤론은 이를 토대로 수차례 학교 설립청원을 제출한 바 있었으나 긍정적인 회신을 받지 못했다. 학교 설립청원이 현실화되지 않는 가운데, 고아원학당 사업은 마펫 선교사가 내한하여 담당하면서 고아원 방식이 아닌 남학교(Boy"s school)’로 전환이 이루어졌다. 선교부 역시 자치, 자립, 자전이라는 네비우스 원칙들을 수행하기 위해 1891년 일련의 규칙들과 정관들을 채택했다. 규칙 적용 중 하나가 고아원에 관한 새로운 운영방침이었다. 즉, 학교에 다니고 있는 소년들 일부는 학비를 부담해야 하며, 방학 중에는 집이 없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자신들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펫은 이를 즉각 행동으로 옮겨 실지로 그런 아이들만 남도록 조치하였다. 그리하여 1891년 2월 남학교가 되었다. 학교로의 전환으로 마펫이 말한 학교 운영의 목적인, ‘선한 사역’, 즉 복음을 전하는 일에 훨씬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게일을 거쳐 밀러가 내한하면서 학당의 책임을 맡으면서 보다 탄탄한 모습의 학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학교 운영방침은 “학생들이 자신의 고향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하는 설교자 내지는 교사로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밀러는 교과과정의 개편을 통하여 다양한 과목을 가르쳤다. 숙식을 제공받는 학생들의 경우 학교에서 필요한 물품을 스스로 마련하거나 봉사를 하도록 하였다.
북장로교의 고아원학교는 윌리엄 베어드(William M. Baird)가 1896년에서 1897년까지 일하게 되면서 기독교 교육만을 추구하는 학교로의 전환이 이루어졌다. 1897년 8월 북장로회 선교부 제13차 연차대회가 열렸다. “기독교학교의 주된 목적은 현지 교회와 지도자들을 성장시켜 자국민들 사이에서 생동감 있는 기독교 활동을 하게 하는 것이다”라며 그동안 진행되어 왔던 교육 사업에 대한 개혁의지를 피력하였다. 이러한 교육정책에 따라서 선교사들은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를 양성하는 전문가가 되어야 했다. 이러한 선교정책 혹은 선교철학은 한국 선교부의 강력한 반기관적인 태도(Anti-institution attitude)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고아원 남학교 사업을 계속하는 것은 재정 낭비와 선교사들의 시간낭비라고 여겼다. 결국, 1897년 10월 선교부는 고아원학교의 완전 폐쇄를 결정했다. 이후 북장로교의 학교사업은 교회 내에 초등학교를 두는 한편, 중학교의 경우 1901년 게일이 연못골에 서양식 커리큘럼을 중심의 교육제도를 강화한 ‘중학교(Intermediate School)를 설립하면서 이어갔다.
언더우드가 시작한 고아원 사업은 기독교적이며 근대적인 고아원이었으며, 선교초기 한국에서 벌인 북장로교의 사회복지선교사업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교가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하는데에 도움을 주었다는 설립 목적을 성취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언더우드 고아원 사업은 목적은 복음전파이며 수단은 복지사업이었다. 그러나 북장로교 선교정책에 입각한 고아원학교가 폐쇄조치에 따라, 고아원과 같은 복지의 의미를 담고 있는 사업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게 되었다.

영어 초록

H. G Underwood started orphanage work in 1886 to raise Korean children who were in miserable situation without home and guardian, by which he intended to achieve gospel dissemination in Korea. Moreover, he hoped to establish college and Theological Seminary to support Korean Christian young people.
Since Korean government accepted missionaries’ proposition, Underwood bought a building by himself and opened the home for orphans on May 11.
Initial management gave success as serving the children with shelter and foods, additionally teaching English, Chinese, and Korean. Missionaries and Korean teachers shared educational work. Despite some financial hardships, Orphan school service became stable. Based on this, H. G. Underwood and J. W. Heron petitioned the government for foundation of educational institution but they couldn’t get positive response. In this situation, orphanage work switched into Boy’s school under the control of Samuel A. Moffett in 1891, Missionaries also changed their rules and articles to follow the Nevius Method(Principle) which emphasize “self-propagation, selfgovernment, and self-supporting” From this changeover, Some of the students needed to pay tuition from this time and to go back to their home on vacation season. Missionaries were able to concentrate on the “evangelical work”. Since then, Boy’s school developed into complete institutional form by J. S. Gale and F. S. Miller who took charges after Moffettt. Their policy of management was “Foster the students to be not only missionaries but also be teachers who would disseminate gospel all over the country”. Miller reorganized the curriculum in which student can learn various subjects and volunteer to procure their own board and lodging.
Presbyterian Orphanage school was changed into pure Christian educational institution over the period of 1896 to 1897, when William M. Baird served for management position. In August 1897, The 13th Conference of the Presbyterian Missionaries held. Missionaries expressed their determination as “The main goal of Christian school is nurture local churches and people to do active christian work among Korean”. In terms of this kind of their own policy, Missionaries had to be expert to educate preachers under the Anti-institution attitude. By this point, they started to estimate orphanage work as waste of time and money so that they determined termination of the work in October 1897. In spite of this closure, the Presbyterian’s educational work continued as the form of Elementary and Intermediate school at Yeon-mot gol(연못골) in 1901.
To Sum, Underwood’s Orphanage service was modern and evangelical social welfare work operated in Korea at early time of missionary. In addition, He could achieve original purpose that to prepare mission work by orphanage, even though the interest upon social welfare work of the Presbyterian decreased from the time of closure.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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