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송대 유태후(劉太后)의 섭정

최초 등록일
2016.02.06
최종 저작일
2015.01
28페이지/파일확장자 어도비 PDF
가격 6,300원 할인쿠폰받기
판매자한국학술정보(주)
다운로드
장바구니
자격시험 이용후기 이벤트

* 본 문서는 배포용으로 복사 및 편집이 불가합니다.

서지정보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수록지정보 : 인문학연구 / 101권
저자명 : 박지훈

한국어 초록

송대의 섭정 황태후의 하나였던 章獻明肅劉皇太后는 송대 정치사상 중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 북송 제4대 인종조에서 유태후가 11년 1개월 동안 (1022년 2월~1033년 3월) 어린 황제를 대신하여 攝政을 한것이다. 史書에는 송대에 당조의 武韋之禍가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현대 학자들 또한 송대 후비들이 현명하다거나 혹은 외척에 대해 엄격하였다는 평가를 하고 있다. 이는 유태후가 전통시대에서 스스로 제위에 오르는 시도를 적극적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하지만 유태후의 섭정시기의 功過에 대해 당대의 관료들이나 후대의 역사가들에게 모순적인 평가를 받아온 것이 사실이다. 우선 긍정적인 평가는 송대 관료제 국가라는 성격을 유지하는데 수행한 역할과 관련하여 보거나 외척·환관의 발호 금지라는 면 등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즉 유태후의 聽政이 趙氏황실을 유지시켜주는 순기능적인 역할을 했다는 측면에 있어서 이는 전통시대 역사관을 대변하는 것이라할 수 있다. 다음으로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서 결혼의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태자의 총애를 얻고 황궁에 들어가서 황후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미모와 정치적인 능력이 출중했으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이는 개인적인 능력 이외에 당시 사회분위기를 말해 주기도 한다. 정절관념에서도 어느정도 너그러웠고, 태종이나 대신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분의 장벽을 넘어서 황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사회 이동이 어느 정도 가능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만 유태후에게 황제가 되려는 야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籍田의 禮라든지 황제에게만 가능한 의례를 시도했던 것, 자신의 부모의 신분을 높이는 시도 등에서 이를 분명히 추론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시도가 좌절된 것은 당시 송대 관료사회가 어느 정도 정착되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그 벽을 뛰어넘어 자신을 지지해 줄만한 정치 세력을 구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유태후의 섭정에 한 편이 되었던 관료들은 그녀를 황권의 대리자로써만 용인하였던 것이고, 외척도 세력화할 수 없었다. 인종의 초기 치세의 정책 결정은 분명히 유태후의 책임 하에 이루어졌을 터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적의 기재는 이 부분에 대한 것은 누락되고 주로 유태후의 섭정과정이나 섭정의 의례와 관련된 사건 등만 제시되어있다. 이는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하나는 당시에 있어서 쟁점이되는 사안이 두드러지지 않았고, 어느 정도 안정적인 치세였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유태후 사후 서하와의 전쟁으로 송은 많은 타격을 입게 되고, 慶歷의 新政이 일어날 만큼 모순이 표출되기에 이르는 것을 보면 그녀의 치세를 긍정적으로만 평가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다음으로 전통시대의 관료들은 여성의 통치행위 자체를 인정하지 않고 섭정을 송이라는 왕조를 유지해주는 하나의 수단으로 여겼기 때문에 굳이 기록하지 않았다고 볼 수도 있다. 유태후는 송대 역사에서 정권의 대리역할을 충실히 수행하여 황제지배 체제가 원만하게 지속되도록 해주었고 정치와 민생의 안정 등 면에서도 일정한 부분 기여했다고 본다. 하지만 유태후는 개인적인 능력은 출중했다 해도 남권 위주의 문신 관료체제라는 정치구조에서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발휘하지는 못하였다. 또한 자신의 야심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무위로 돌아갔다는 것도 한계로 볼 수 있다.

영어 초록

宋代第四統治者·八位攝政皇太后之一章獻明肅劉皇太后在宋代政治史上有重要的地位. 劉太后在北宋仁宗朝時期, 代替小皇帝攝政了11年又1個月(1022年2月~1033年3月). 劉太后自眞宗天禧4年(1020)至仁宗明道2年(1033)掌握宋朝的朝廷, 實事上有類似皇帝的地位. 在史書裏記載在宋朝沒有類似唐朝的武韋之禍, 而且現在史學者也是記載宋代后妃賢明而對外戚要求嚴格. 因爲劉太后自己沒有試圖謀取皇帝地位的野心, 當代官僚和後代史學者對劉太后攝政時期的評價有矛盾. 首先, 積極的評價主要關注爲了維持宋朝官僚國家有貢獻或壓制外戚·宦官的勢力等的方面. 卽在劉太后的攝政維持趙氏皇室的功能的角度來代表傳統時代的歷史觀.再次, 劉太后在寒微的家族出生·且再婚, 受到太子寵愛而進皇宮.後來當皇后的原因是저的美貌與政治的能力. 這不是正式程序下可能的事情, 除了個人能力以外說明當時社會對貞節觀念較寬松. 太宗與大臣們的反對可能是身빈差異.但是判斷劉太后不是當皇帝的想法, 因爲劉太后進行只能皇帝才進行的禮, 而且試圖提高저父母的身빈. 劉太后的試圖最終失敗了,其原因是當時宋代官僚社會已經穩定, 而且저沒有조到支持自己的政治勢力. 支持저的攝政身빈的官僚們只認可攝政身빈而外戚無法勢力化.仁宗初期決定政策的權力肯定在劉太后的手中, 但在史籍記載中漏了這些內容, 而只是記載劉太后的攝政過程和攝政儀禮的事件.這些可兩種可能, 第一;當時是較穩定的統治時期, 但劉太后死後宋朝與西夏戰爭宋朝收到較大的打擊, 而發生慶歷新政顯出當時社會的矛盾. 故對저的統治時期積極的評價有些問題. 第二;傳統時期的官僚否認對女性統治者統治行爲, 而承認攝政是輔助維持王朝的一種手段, 所以不許記載攝政時期的內容.劉太后自己當不了皇帝, 而擔任代理宋朝政權的任務. 對圓滿維持皇帝支配體制, 穩定政治和民生等方面有貢獻. 劉太后有個人能力, 但是在以男權中心的文臣官僚體制下, 無法完全發揮自己的能力. 雖然有自己的野心, 但是有群臣的限制最終發揮不了自己才能.

참고 자료

없음

자료문의

제휴사는 별도로 자료문의를 받지 않고 있습니다.

판매자 정보

한국학술정보(주)는 콘텐츠 제작에 도움이 되는 솔루션을 기반으로 풍부한 문화 콘텐츠를 생성하여 새로운 삶의 가치를 창조합니다.

본 학술논문은 한국학술정보(주)와 각 학회간에 저작권계약이 체결된 것으로 AgentSoft가 제공 하고 있습니다.
본 저작물을 불법적으로 이용시는 법적인 제재가 가해질 수 있습니다.

우수 콘텐츠 서비스 품질인증 획득
최근 본 자료더보기
북송대 유태후(劉太后)의 섭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