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한국 영화계의 욕망과 ‘국민감독’ 임권택의 탄생

저작시기 2015.06 |등록일 2015.08.07 | 최종수정일 2018.11.14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35페이지 | 가격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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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극예술학회 수록지정보 : 한국극예술연구 / 48권
저자명 : 송아름

목차

〈국문초록〉
1. 1980년대, 새롭게 발견한 감독 임권택
2. 국제영화제가 선택한 ‘예술 영화’의 부상
3. 상업영화와 거리를 둔 ‘순수한 한국 영화’에 대한 갈망
4. 영화시장의 위기와 대안으로서의 ‘한국적 작가’ 형성
5. ‘불쌍한 땅’에 대한 인식과 영화의 정형화
6. ‘국민감독’의 무게를 덜어내기 위하여
참고문헌
Abstract

한국어 초록

임권택은 한국 영화의 중심이자 거장으로 간주된다. 1962년부터 영화를 찍기 시작하여 2015년 102번째 영화를 발표하기까지 그가 겪어온 세월은 그 자체로 영화사가 되었다. 그러나 임권택이 이 같은 평가를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엄밀히 말해 1980년대부터인데, 이 글은 바로 이 시기 영화계의 욕망들이 어떻게 임권택 감독을 발견하고, 의미를 부여했는지의 과정을 살펴보고자 한다. 임권택은 1981년 발표한 <만다라>가 국제영화제에 진출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다. 국제사회에 한국의 성장을 알리고 과시하기 위한 노력이 다각도로 이루어지고 있던 때에 임권택은 국제영화제에 한국이라는 지역을 알리며 중요한 자리를 점하게 된다. 이 과정 중 발생한 일련의 잡음들은 임권택의 영화가 단지 과시용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키면서 영화 예술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능하게 했다. 이 시기 임권택은 자신의 영화를 상업적인 영화와 자신의 의지를 바탕으로 찍은 영화들로 구분하기 시작하는데, <만다라>는 순수한 한국 영화의 성과로 자리할 수 있었다. 이 같은 임권택의 인식은 당시 자본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권 영화를 비판하던 비평계의 욕망과 맞닿으면서 비평계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이끌어냈다. 오랫동안 다양한 영화를 찍어온 임권택은 이론적인 의미에서 작가로 규정될 수 없었지만, 임권택이 영화계에 몸담은 시간을 바탕으로 장인으로 인정하고, 유럽영화인들과 임권택을 동일한 선상에 놓으려는 욕망 속에서 그는 작가로 전환된다. 이 사이 임권택은 자신의 땅을 불쌍하다는 감상적 심상 아래 두고 셀프오리엔탈리즘과 대상화된 여성의 몸을 통해 한국의 이미지를 형성해나간다. 임권택이 해방 후 한국 영화계의 산증인이자 역사임은 분명하지만, 현재의 명성에 덧붙여진 무게는 한국 영화계가 욕망하는 감독상을 통해 서서히 형성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영어 초록

Im Kwontaek is considered the mainstay and godfather of Korean film. The time he has been through, from 1962 when he started filming till 2015 when he produced his 102nd film, itself, has become a history of film. However, he could be evaluated like this actually after he went through the 1980s, and this study will look into the process of creating a myth of Im Kwontaek through the desire of the Korean film industry at this time. Im Kwontaek began to win fame as his Mandala, released in 1981 entered an international film festival. While efforts to let the international communities know the growth of South Korea and show it off were made from various angles, Im Kwontaek began to occupy a significant place in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promoting South Korea. As a series of noises made during this process confirmed that Im Kwontaek’s films were not just demonstrative ones, it brought new awareness to film art. Furthermore, Im Kwontaek made his films separate into two-films for commercial purposes and for his own satisfaction and gave different meaning to each one. As it met the desire of the critics, who criticized the system of Korean cinema, it led the active movement of critics. Having produced various films for a long time, Im Kwontaek could not match up to an auteur in a theoretical meaning, but his set of attitudes towards the establishment of the mainstay of the Korean film and describing its artistic accomplishments converts him to an auteur in the desire of attempting to put him on the same line as European film makers. Meanwhile, Im Kwontaek himself has learned the look of a national cinema that international film festivals want and formed the images of Korea through Self-Orientalism and objectified women’s bodies. Although it cannot be denied that Im Kwontaek is a living witness and history of the Korean film industry since the Independence, it can be said that the weight added to his present reputation has been slowly formed through the image of a film director desired by the Korean film indus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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