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百濟) 사비기(泗斐期) 익산(益山) 개발(開發) 시기(時期)와 그 배경(背景)

저작시기 2015.01 |등록일 2015.04.27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37페이지 | 가격 7,2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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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수록지정보 : 백제연구 / 61권
저자명 : 리병호 ( Lee Byong Ho )

없음

한국어 초록

익산 지역에서 출토된 백제 사비기 유물 중에는 600년 무왕 즉위 이전으로 편년할 수 있는 자료들이 섞여 있다. 본고는 백제 중앙에서 익산 개발에 착수한 시기를 분석하고, 그 배경이 무엇인지를 밝히고자 했다. Ⅱ장에서는 무왕 부부의 무덤으로 알려진 익산 쌍릉에 대해 고분 구조의 변천과 더불어 木棺을 꾸미는 금동제장식품을 분석했다. 그 결과 능산리형 석실 중 중상총과 능산리 7호분은 6세기말에서 7세기초로 편년되지만 익산 쌍릉은 그 보다 늦은 것으로 보았다. 또 쌍릉 중에서 소왕묘가 먼저 만들어지고 대왕묘가 나중에 축조된 것을 확인했다. 이것은 쌍릉이 641년과 642년에 죽은 무왕 부부의 무덤은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대왕묘 출토품의 경우 미륵사지 사리기 보다 늦게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어 이곳이 무왕릉일 가능성이 높다. Ⅲ장에서는 익산 왕궁리유적과 미륵사지, 제석사지 등 익산 지역 주요 건물지의 초축 상한을 검토했다. 익산 왕궁리유적 출토 와당은 6세기말부터 기와 건물의 축조가 시작되었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미륵사지에서는 6세기말에서 7세기초까지 소급되는 기와가 소수 출토되는데 이는“아버지가 터를 닦고 아들이 건물을 완성하였다”는 기록과 관련될 가능성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볼 때 소왕묘가 혜왕릉이나 법왕릉일 가능성이 없지 않지만 출토유물이 6세기말 보다는 7세기 전엽에 속하기 때문에 그 주인공은 무왕보다 먼저 죽은 또 다른 왕비인 선화공주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Ⅳ장에서는 6세기말부터 익산 지역이 집중적으로 개발된 배경으로 교통의 요지이자 관문 항구로서의 역할을 강조했다. 백제는 554년 성왕의 전사와 신라의 한강유역 진출, 562년 대가야의 멸망과 그에 따른 섬진강 루트의 단절로 인해 금강 하류역의 중요성이 더욱 부각되었다. 금강변의 웅포나 성당포에는 신라의 울산항이나 일본의 難波와 마찬가지로 백제의 관문 항구이자 물류거점이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익산 왕궁리유적 공방에서 생산된 고가의 물품들은 이러한 항만 시설을 통해 유통되었고, 대규모 사원과 왕궁 시설은 그것을 지원하고 국가적인 의례가 이루어지는 중요한 장치였다.

영어 초록

Among the artifacts unearthed from Iksan are materials that date from the period preceding the enthronement of King Mu of Baekje(18BC-660AD) in 600. This paper attempts to determine when and why the central government of the Baekje Dynasty started developing Iksan. Chapter 2 presents an analysis of the gilt-bronze accessories placed in the wooden coffins in the Twin Tombs(Ssangnueng), Iksan, which are said to be the tombs of King Mu and his wife, and discusses the ways in which the structures of ancient tombs changed over time. According to the analysis, it appears that the mid-upper tomb and No.7 tomb among the stone chambers in the style of Neungsan-ri in Neungsan-ri Tomb site located in Buyeo date from sometime between the end of the 6th century and the early 7th century, while the Twin Tombs site dates from a later period. It was also found that the larger of the Twin Tombs was formed later than the smaller one. This suggests that the smaller of the Twin Tombs is not that of King Mu’s wife, who died in 642, but that the larger one is highly likely to be that of King Mu, based on the artifacts which appear to date later than the reliquary of Mireuksa Temple. Chapter 3 conjectures when the major buildings in Iksan such as the Wanggung-ri, Mireuksa Temple, and Jeseoksa Temple sites were initiated. Roof-end tiles found at the Wanggung-ri site indicate that the construction of buildings with roof tiles started toward the end of the 6th century. A few roof tiles found at the Mireuksa Temple site date from the end of the 6th century through the early 7th century, and they can be related to the remarks in the relevant record: “The father prepared the site and the son completed the construction of the building.” In that context, the smaller of the Twin Tombs is likely to be that of Princess Seonhwa, another wife of King Mu, who died before King Mu based on the fact that the relics unearthed there date from the early 7th century rather than the end of the 6th century, although there is no ruling out the possibility that the smaller tomb is that of King Hye(r.598-599) or King Beop(r.599-600). Chapter 4 attributes the commencement of the intensive development of Iksan at the end of the 6th century to its location as a major transportation point and important port of the kingdom. During the Baekje period, the lower reaches of the Geumgang River became important due to the following factors: King Seong (r.523-554) was killed in action in a war with Silla; Silla advanced to the estuary of the Hangang River; and Dae Gaya fell in 562, which cut off Baekje’s access to areas along the Seomjingang River. It is surmised that Ungpo Port or Seongdangpo Port on the Geumgang River served as logistics footholds for Baekje, just as Ulsan Port did for Silla and Naniwa did for Japan. The expensive objects produced in workshops at Wanggung-ri must have been distributed via such a nearby port. The large temples and royal palaces situated nearby must have been crucial institutions that provided support for such rituals.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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