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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ㆍ발행기관 : 동국사학회
ㆍ수록지정보 : 동국사학 / 54권
ㆍ저자명 : 김주용
ㆍ저자명 : 김주용
목차
Ⅰ. 머리말Ⅱ. 민족의식 자각, 삼일운동에 참여하다
Ⅲ. 중국 안동에서의 생활
Ⅳ. 보이지 않는 손, 독립운동을 지원하다
Ⅴ. 맺음말
한국어 초록
몇 해 전부터 경기도 수원에서는 불꽃같은 정열의 여성을 해마다 기리고 있다. 바로 나혜석이 그 주인공이다. 정월 나혜석(1896~1948)은 경기도 수원에서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 지방 관료를 지낸 나기정의 5남매 가운데 넷째로 태어났다.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혜석은 집안의든든한 후광을 바탕으로 일본 유학까지 다녀와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라는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의 유학생활은 치열했다. 남학생들의 편견과 식민지 여성의 한계를 뼈저리게 느꼈다. 봉건적 인습과 민족적 차별이라는 두터운 벽에 가로막혀 있던 나혜석은 조선여자유학생친목회를 주도적으로 이끌면서 인습과 차별에서 탈출하려고 했다. [여자계]의 발행과 삼일운동 참여는 그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진 결과였다.기존 나혜석 연구는 나혜석의 문학적 측면, 여성학적 측면, 최초의 여성화가라는 수식어 명명에 집중적으로 할애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결과 나혜석 연구는 한층 성숙된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가 남긴 유산에 대한 시각은 다양성을 내포하면서 사회 전 분야를 고루 아우르고 있었다. 나혜석이 한국 근대사에서 선각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한 사실이다. 거의 모든 연구에 ‘선각자 또는 선구자 나혜석’을 부각시켰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나혜석이 자신의 꿈과 이상을 펼쳤던 시기이자 인생의 이막이라고 할 수 있는 결혼생활이 시작되던 안동에서의 생활을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한다. 안동에서의 생활은 나혜석의 민족의식이 민족운동과 결합한 3?1운동의 참여를 넘어선 ‘기득권’ 생활의 포기와 같은 것이었다. 그만큼 안동은 나혜석의 민족운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공간이었다.
그가 그린 만주 특히 안동은 국경도시이자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공간이었다. 시간의 흔적을 더듬던 나혜석은 이혼 후 잡지 삼천리에 안동의 모습을 그렸다.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본제국주의는 한국역사에서 첫 신도시 신의주를 건설하여 대륙으로 가는 창구를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대륙에서는 한반도로 오는 창구로 안동을 적극 활용했다. 안동에 일본영사관이 타 지역에 비해 빨리 설립된 것도 이와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나혜석이 지닌 독립 운동가로의 위상을 밝혀 그동안 한국 근대사의 ‘선각자, 선구자’ 및 ‘실패한 여성운동가’로 짓눌린 나혜석의 인생의 황금기를 복원하려 했다. 바로 두 가지 독립 즉 인습으로부터의 독립과 이민족으로부터의 독립을 실천했던 나혜석의 독립운동의 특징이 바로 여기에 있다.
영어 초록
何年前から京畿道水原では炎のような情熱の女性を每年に?えている。まさに羅蕙錫がその主人公である。晶月羅蕙錫(1896~1948)は京畿道
水原で大帝國韓期と日帝?占期地方に官僚を務めた羅基貞の五人兄弟の
なかで四番目に生まれた。比較的裕福な家庭で生まれた羅蕙錫は家柄の
十分な後光をもとに日本留?まで行ってきて韓國最初の女性洋?家とい
う位置を占めるようになった。彼女の留?生活は熾烈だった。男の?生
の偏見と植民地の女性という限界を痛く身にしみた。封建的因習と民族
的差別という厚い壁に遮れていた羅蕙錫は朝鮮女子留?生親睦?を主導
的に率いりながら因習と差別から?しようとした。女子契を發行した
ことと三?一運動に??したことは、その延長線の上にからわれた結果
であった。
?存の羅蕙錫?究は羅蕙錫の文?的側面、女性?的側面、最初の女性
洋?家という修飾語命名に集中的に割愛し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
その結果、羅蕙錫?究はもっと成熟した段階に入ったといえる。彼女が
?した遺産に?する視?、多?性を?包しながら社?の全分野をあまね
く包含していた。羅蕙錫が韓?近代史に先?的位置を占めていることだ
けは明らかな事?である。ほとんどあらゆる?究に先?者また先?者羅
蕙錫を浮き彫りにしたといっても過言ではない。
羅蕙錫が自分の夢と理想を?げた時期でもあり、人生の二幕といえる
結婚生活がはじまった安東での生活を重点的に扱おとする。安東での生
活は羅蕙錫の民族意識が民族運動と結合した三?一運動に??したこと
を越した、⌈?得?⌋生活の放棄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それほど安東は
羅蕙錫の民族運動を理解するのに重要な空間だった。
彼女が描いた?州、特に安東は?境都市でもあり、彼女の?春がその
まま染み?んでいる空間だった。時間の痕跡をたどった羅蕙錫は離婚の
後、?誌三千里に安東の姿を描いた。1905年乙巳勒約の以?、日本帝?
主義は韓??史ではつの新都市の新義州を建設して大陸へいった窓口に
ついた。しかのみならず、大陸から韓半島へくる窓口に安東を積極的に
活用した。安東に日本領事館が他の地域に比べてはやく設立されたこと
も、これと別個に考えられない。
羅蕙錫が備える?立運動家としての位相を明かすことによってその間
韓?近代史の⌈先?者、先?者⌋および⌈失敗した女性運動家⌋とくびきが
掛けられていた羅蕙錫の人生の?金期を復元しようとした。まさに二つ
の?立、すなわち因習からの?立と異民族からの?立を?行した羅蕙錫
の?立運動の特?がまさにここにある。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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