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王朝実録』に見える「公共」の用例の検討

저작시기 2012.11 |등록일 2015.03.22 | 최종수정일 2017.09.07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24페이지 | 가격 6,1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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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윤리교육학회 수록지정보 : 한국윤리교육학회 학술대회 / 121 ~ 144 페이지
저자명 : 가타오카 류,이명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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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초록

본 논문에서는 ‘공공행복’에 대한 고찰을 준비하는 단계로써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공공’ 용례를 중국의 용례와 비교하여 그 특질을 밝히는 한편 조선왕조 500년 동안 나타는 용례 수치의 증가 및 감소 경향과 발화주체, 의미내용의 변화에 대하여 개관하였다. 먼저 『조선왕조실록』에 나타난 ‘공공’의 용례 수는 600건을 넘으며, 중국의 경우 중국25사 14 건, 『자치통감』 6건, 『명실록』 10건 등과 비하여 그 수가 월등히 많다. 이점에서 한반도에서 는 명확한 윤곽을 가진 말로써 ‘공공’이 사용되었음을 예측할 수 있다. 17세기에 들어서 쓰여진 『승정원일기』는 용례 수치만을 보면 『조선왕조실록』을 능가하고 있으나 전체 문자수 중의 점 유율을 비교하면 후자에 미치지 못한다. 적어도 16세기 이전의 ‘공공’ 용례를 검토하는 사료로써 『조선왕조실록』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가치를 지닌다.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공공’ 용례는 『사기』장석지 열전에 보이는 “법이란 천자조차도 천하만민 과 함께 공공하는데에서 성립하는 것입니다”인데, 여기에서의 ‘공공’은 명사(이념)가 아니라 동사 (행동)이며, 또 ‘공공하는’ 주체의 비중을 천자보다는 천하만민에 두고 있다. 이는 14세기 말에 쓰 여진 『고려사』의 용례 이후로 『조선왕조실록』에서도 계승되어 왔으며, ‘공공’의 기본적인 의 미이다. 그러나 11세기 말 중국의 『자치통감』에서는 ‘공공’은 ‘공정’, ‘공개’의 의미에 접근하고 그 주체 또한 천자(성왕)로 변화하였다. 『사기』에서는 법을 공공하는 것은 사람들을 궁휼히 여기는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라 하였 으나, 한반도에서는 법을 공공하는 것은 윤리에 어긋나는 행위에 대한 분노의 감정에 의한 것이라 고 한 점에서 차이가 보인다. 그러나 근본적으로는 모두 사람들의 연대에 의해 성립하는 현 세계 를 수호하기 위한 것이었다. 이상처럼 『조선왕조실록』의 ‘공공’의미는 성리학과 무관계하다. 『주자어류』에서는 ‘공공’ 용례 건수가 적으며 그 대부분은 ‘도리’와 연관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도리’가 본디 하나라는 점이 강조 되면서 타자와의 관계성이 사상되고 자신 마음 속의 ‘도리’를 추구하면 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 러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본디 하나인 도리에서 벗어난 존재를 전제로 한 후에, 이에 대해서 천하 고금의 타자와 공공할 것을 요구하는 용례가 주류이다. 『조선왕조실록』의 ‘공공’은 다음의 네 시기로 나누어서 파악할 수 있다. (1) 제1대 태조~제11대 중종(1392~1544) 약 150년간 (2) 제12대 인종~제15대 광해군(1544~1623) 약 80년간 (3) 제16대 인조~제20대 경종(1623~1724) 약 100년간 (4) 제21대 영조~제27대 순종(1724~1926) 약 200년간 (1)은 용례가 적고, (2)에서부터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하며, (3)은 최대 전성기이며, (4)에서는 정 조시대를 중심으로 고조되었다. (1)시기에서는 ‘공공’의 발화주체는 대부분이 사헌부, 사간원의 ‘대간’에 한정되어있다. 즉 ‘공공’은 왕에게 간언하기 위한 것이었다. 15세기 말에 홍문관이 독자적인 언관의 기능을 가지게 되면서 삼 사체제가 확립되고 이들의 언관활동에 의해 사림파의 정권장악이 준비되었다. 이 점이 (2)시기의 ‘공공’ 용례가 증가하는 배경이다. 나아가 사림파가 동서로 분당(1575년)하고 ‘공 공’은 소속하는 당파의 주장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것으로 이용되어졌다. 발화주체는 삼사를 넘어서 범위를 확대하게 되는데, 이 시기에는 왕 스스로가 ‘공공’을 사용하는 경우는 없다. (3)시기에 들어서 처음으로 왕이 ‘공공’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단, 이러한 용례는 극히 소수이며 또 한 왕 스스로의 생각을 ‘공공’이라고 칭하는 경우는 없다. 한편, 이 시기에는 ‘공론이 들끓으면 한 사람 대간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표현이 주목을 끈다. 이 점에서 ‘공공’이 더 이상 대간 의 전유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4) 시기에 왕이 주체적으로 ‘공공’이라는 말을 빈번하게 사용하게 되는 복선이 된다. 특히 정조에게 이러한 경향이 짙다. 이 때 ‘공공’의 의미는 사마광이나 주희가 사용한 의미에 비슷해져 다른 의견을 불허하는 하나의 ‘공공’이 왕의 마음 속에 있다고 전제되고, 이것이 왕의 통치의 정당 성을 보증하게 된다. 19세기 말에 고종이 반포한 ‘대한국국제’는 대한제국의 정치체제는 전제정치이며, 대한국대황제는 무한한 군권을 향유하며 이를 침범하는 신민의 도리를 박탈할 수 있다는 점을 선언한 것이었다. 이는 (4)시기의 ‘공공’ 의미의 결정적인 변화와 관련되어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 ‘국제’를 천하에 명시하는 것은 영구히 끊임없는 행복의 초석이 되리라고 하였다. 이러 한 표현은 1910년 일본이 한국을 합병하는 조약을 교부한 날에 발표된 메이지 천황의 칙서 속에서 의 논리와 상통하는 바가 있다. 즉, ‘공공’의 ‘행복’은 제도에 의해 위에서부터 아래로 가져다준다는 논리로 현재 일본에서도 여전히 뿌리깊은 사고이다. 그러나 ‘대한국국제’ 이후 한일합방 이전의 고종의 말 속에서는 고려시대 말부터 이 시기에도 여전 히 저류에서 울려 퍼지고 있는 ‘공공’의 기본적인 의미도 간취할 수 있다. 그것은 사람들의 연대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수호하기 위해 만민 외에도 과거나 장래에서부터 즉, ‘신인神人의 분憤’에서부 터 인간에게 윤리를 요구하는 목소리였다. 한반도의 왕들은 아마도 신화 시대에서부터 항상 이점 에 귀를 기울였다고 생각된다. 이점을 재고함으로써 ‘공공행복’을 앞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읽어내 는 단서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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