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전후 일본의 대외전략과 군사정책

저작시기 2014.08 |등록일 2014.10.27 | 최종수정일 2018.11.14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29페이지 | 가격 6,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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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정치외교사학회 수록지정보 : 한국정치외교사논총 / 36권 / 1호
저자명 : 박영준

목차

Ⅰ. 문제의 제기
Ⅱ. 전쟁의 원인: 메이지 시기 일본의 대외정책론과 군사태세
Ⅲ. 전쟁의수행:‘ 문명의전쟁’과제한전쟁론
Ⅳ. 전시중 조선정책과 전후 구상
Ⅴ. 맺는 말
참고문헌

한국어 초록

청일전쟁의 원인에 대해서 국내 학계에서는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정부가 일관되게 추진해온 대륙침략의 정책방향이 결과된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본 고에서는 이와 달리,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내에 근대화우선론과 대륙팽창론 등의 국가전략적 대립이 있었다는 전제 하에, 이 두가지 전략담론이 청일전쟁의 발발과 수행과정, 그리고 종전 과정에서 어떻게 상호 작용하는가의 관점에서 전쟁의 양상을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이토 히로부미와 야마가타 아리토모에 의해서 각각 대변된 이 두가지 정책담론은 동학농민전쟁 이후 청국에 대응하여 조선 내에 병력을 파병해야 하는가에 관해선 정책 이견없이 일치를 보았다. 그러나 실제의 전쟁 수행, 조선에 대한 점령정책, 그리고 강화조건에 관해 양측은 견해의 차이를 노정하였다. 예컨대 대륙팽창론자들이 청국의 군사적 굴복을 목표로 보다 광범위한 영역의 확보를 주장한 반면, 근대화 우선론자들은 제한적인 목표의 달성에 만족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일본내 전쟁 정책의 대립은 일종의 근대적 전쟁 수행체제였던 대본영에서의 논의를 통해 조정되어 갔다.
일본은 전쟁 수행 체제 측면에서는 근대적 군사체제에 바탕한 ‘문명의 전쟁’을 수행했지만, 조선과 청국의 양민에 대한 일련의 학살사건, 그리고 조선에 대한 강압적 점령정책은, 결국‘야만의 전쟁’을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영어 초록

It has been generally recognized that the first Sino-Japanese war(1894-95) was a result of the expansion policy of the Meiji governement since its establishment in 1868. Contrary to this general understanding in Korea, this paper presupposes that there had been contradictory national strategies in Japan right after the Meiji Restoration, reformers for modernization and expansionist toward the continent. The one stressed that Japan should pursue the modernization reform as the utmost mission focusing on the adoption of Western institutions and ideas. Whereas the other made claim that Japan should expand its territory toward the Asian continent with the purpose of deterring Western encroachment to Japan.
These two streams were united at the moment when Japanese government decided to dispatch its armed forces to the Korean peninsula where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was erupted. However, the two factions disputed each other on the way of warfare against the Qing dynasty, occupation policies toward Joseon, and the conditions of peace treaty with Qing. These disputes were finally dissolved through the policy coordination in the Imperial Headquarter (Daihonei) which was established for the first time in Japan.
Even though Meiji government proclaimed the civilized war against barbarian Qing dynasty, the war proved that Japan itself conducted another barbarian war by implementing coercive occupation policy toward Joseon as well as committing massacres against the Koreans and the Chinese 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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