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논문 :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과 일본의 근대지(近代知)

저작시기 2014.01 |등록일 2014.09.02 파일확장자어도비 PDF (pdf) | 26페이지 | 가격 6,100원
다운로드
장바구니관심자료
상세신규 배너

* 본 문서는 배포용으로 복사 및 편집이 불가합니다.

서지정보

발행기관 : 한국사상사학회 수록지정보 : 한국사상사학 / 46권
저자명 : 조명제 ( Myung Je Cho )

없음

한국어 초록

한용운은 1970년대에 민족문학론과 관련하여 『창작과비평』에 의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이러한 문학사적 평가에 따라 80년대 이후 민족문학론의 시각에서 많은 연구 성과가 제시되었다. 또한 90년대 이후에는 근대불교사를 비롯한 인문학 전반으로 연구가 확대되었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한용운 연구는 민족 담론에 입각한 ‘신화화된 이미지’가 확대, 재생산된 문제점을 갖고 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인 『조선불교유신론』에 대한 연구도 대부분 한용운의 근대불교, 민족불교에의 지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결론으로 일관되고 있다. 이러한 한용운 연구의 한계와 문제점을 벗어나기 위해 이 글은 사상 연쇄라는 관점에서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가 량치차오라는 필터를 거쳐 한용운에게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문명론과 근대철학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일본의 근대지가 『조선불교유신론』에 어떻게 반영되었는가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다. 첫째, 한용운은 서구 근대 문명론의 시각에서 당시 불교계의 반문명적인 현상, 즉 미개하고 야만적인 요소를 다양하게 비판하였다. 또한 그의 문명론에는 문명개화론적 문명관과 사회진화론에 입각한 문명론이 중첩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문명론은 량치차오의 『음빙실문집』을 통해 수용하였지만, 그것은 후쿠자와 유키치, 가토 히로유키 등으로 대표되는 메이지 일본의 문명론이 번역과 번안을 통해 옮겨진 언설이었다. 둘째, 한용운은 불교의 철학적 성질에 대해 서양 철학이 불교와 합치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칸트철학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과 내용은 표면적으로 량치차오의 언설을 그대로 옮긴 것이지만 메이지 일본의 근대철학의 흐름과 깊은 관계가 있다. 그것은 이노우에 엔료가 불교의 근대화를 지향하여 서양의 근대철학을 수용하고, 불교를 재해석하였던 관점과 진화론, 동서철학까지 포괄하던 지적 작업의 영향과 관련된다. 또한 메이지 일본에서 칸트철학이 유행하게 된 것은 일본의 근대국가 건설이 독일을 모델로 삼으면서 독일학이 학계, 지식계에서 전반적으로 수용되었던 흐름과 관련된다. 셋째, 한용운의 불교 개혁안은 당시 불교계의 상황을 직시하면서 제기한 독자적인 방안도 있지만, 개혁의 방향 설정이나 그에 따른 입론 자체가 일본의 근대지에서 폭넓은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일본의 근대지는 근대철학의 수용에서 단적으로 드러나듯이 서양철학의 계기적 발전이나 맥락을 고려하지 않거나 국가별로 존재하는 철학 경향의 특성을 무시하는 등 근본적인 한계를 안고 있었다. 또한 량치차오가 수용하고 이해한 메이지 일본의 근대지는 결국 의사(擬似) 근대 체험의 한계를 가졌다. 더욱이 한용운은 량치차오라는 또 하나의 필터를 거쳤기에 더욱 착종된 형태의 근대지를 받아들였다. 『유신론』에서 서구 문명론이라는 타자의 시선으로 전통불교의 자산을 대부분 미개한 것으로 비판한 언설은 그러한 한계와 관련된다.

영어 초록

After Sinyubakhae(辛酉迫害, persecution of Catholics in 1801), the previous tolerant trends of thought was threatened, but the production and consumption of popular readings such as novels and folk tales were rather thriving. This thesis is a study about the continuous yet broken stream of thought between the late 18th and the early 19th century. The secularization of Joseon society had accelerated since the 18th century. Such a change originated from a new cultural fashion in Seoul. The secularization, in spite of continuous restriction of government, gradually changed the society which had been controlled by the Confucian norms. As a result, there appeared new intellectual groups, who were free of the consciousness of Bungdang(朋黨) or social status. The reaction against this trend began in the early 19th century. Especially, new studies about Seohak(西學) were considerably repressed. After 1806, however, it is ironically the government that lost its power of command. Governmental policies about these new thoughts were so high-handed that intellectuals restored their vigor pretty soon. Communication among intellectuals and accumulation of knowledge were very active enough even to call ``the birth of knowledge world``. But, unavoidably, the process was a refracted one, so most of their works could not exceed the progressiveness of the late 18th century, though with some rare exceptions.

참고 자료

없음
  • 구매평가(0)
  • 구매문의(0)
      최근 구매한 회원 학교정보 보기
      1. 최근 2주간 다운받은 회원수와 학교정보이며
         구매한 본인의 구매정보도 함께 표시됩니다.
      2. 매시 정각마다 업데이트 됩니다. (02:00 ~ 21:00)
      3. 구매자의 학교정보가 없는 경우 기타로 표시됩니다.
      4. 지식포인트 보유 시 지식포인트가 차감되며
         미보유 시 아이디당 1일 3회만 제공됩니다.
      상세하단 배너
      우수 콘텐츠 서비스 품질인증 획득
      최근 본 자료더보기
      상세우측 배너
      일반논문 : 한용운의 『조선불교유신론』과 일본의 근대지(近代知)
      페이지
      만족도 조사

      페이지 사용에 불편하신 점이 있으십니까?

      의견 보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