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납토성의 성격

저작시기 2011.10 |등록일 2011.12.03 한글파일한컴오피스 (hwp) | 9페이지 | 가격 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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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사학과 졸업 학위논문입니다.

목차

Ⅰ. 머리말
Ⅱ. 문헌자료에 나타난 위례성
Ⅲ. 풍납토성 발굴배경과 그 성과
Ⅳ. 맺음말을 대신하여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 머리말

위례성은 백제가 475년 웅진으로 천도하기까지 500년 동안 도읍을 두었던 곳으로, 『삼국사기』, 『삼국유사』등의 문헌에서 그 이름이 나타난 바 있지만, 정확한 그 위치는 알려져 있지 않아서 그 위치에 대해서는 학자들의 여러 다른 주장이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위례성은 직산이라고 언급한 바 있으며, 조선시대 정약용은 『강역고』에서 백제 초기도성의 위치는 직산이 아니라 한양성의 동북쪽이라고 새로운 주장을 내세웠다. 일제시대 일부 일본인 학자들은 풍납토성을 『삼국사기』의 「백제본기」에 보이는 ‘하남위례성’으로 인식하기도 하였다. 이 후에 풍납토성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백제의 첫 왕성 문제에 관하여 풍납토성에 주목하게 되었는데, 그 배경은 다음과 같다.
1925년 ‘을축년 대홍수’ 때 풍납토성의 서쪽 벽이 허물어졌는데 여기서 삼국시대 전기의 청동제 초두 2점이 발견되면서 풍납토성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병도가 풍납토성은 백제의 도성이 아니라 ‘사성(蛇城)’이라고 주장하면서 그의 학설이 오랜 기간 동안 정설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그동안 풍납토성을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되어왔다. 1964년 김원룡의 발굴을 통해 풍납토성이 백제의 중요한 성일 가능성을 불러 일으킬만한 성벽과 토기, 기와 등의 유물들을 얻어내었으나, 그는 풍납토성이 왕성이라는 가능성은 뒤로한 채, 이 전부터 정설화 되어왔던 이병도의 사성이라는 주장에 가까운 결론은 내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1997년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고, 이 발굴은 많은 백제시대의 건물터와 그 흔적들이 밝혀냈으며, 유물들 또한 대거 출토되는 성과를 갖고 왔다. 이를 시작으로 하여 지금은 이곳이 백제의 첫 왕성, 위례성으로 유력하다 주목받고 있으며 현재까지도 발굴․조사 중에 있다.

참고 자료

김태식, 『풍납토성, 500년 백제를 깨우다』(서울, 김영사, 2001)
노중국․정재윤․김영심․김기섭․권오영, 『한성백제의 역사와 문화』(서울, 서경문화사, 2007)
오순제, 『한성백제의 도성체제 연구』(서울, 학연문화사, 2005)
이형구, 『백제의 도성(都城)』(서울, 주류성, 2004)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위례산성』(서울, 서경문화사, 2003)

(2) 자료
서울역사박물관,『풍납토성-잃어버린 왕도를 찾아서-』전시도록, 2002
국립문화재연구소,『풍납토성 500년 백제왕도의 비젼과 과제』, 풍납토성 발굴 1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 자료집, 2007

(3) 논문
강인구, 「백제 초기 도성 문제 신고」, 『한국사연구』81(한국사연구회, 1993)
권오영, 「풍납토성 출토 외래유물에 대한 검토」,『백제연구』36(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2)
민덕식, 「성곽유적으로 본 백제 전기도성 연구」,『서울학연구』9(서울시립대학교 부설 서울학연구소,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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