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상의 월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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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이태준
출판사
-
출판년도
2000.07
판매자(주)북코스모스
퀴즈풀이 출석이벤트

목차

삶을 지켜주었던 커다랗고 투박한 두 손
이태준은 '엿장사의 엿가위처럼 크고 투박스런' 자신의 손을 내려다볼 때마다 설움에 잠기곤 했다. 그의
손은 채 뼈마디가 굳기도 전인 어린 시절부터 먹고살기 쉴새 없이 움직여야 했다. 그래서 남들이 크고 험
한 손이라고 곧잘 흉을 보아도 그는 자신의 손 때문에 자신이 이만큼 살아갈 수 있었노라고 자조 섞인 농
담을 했다. 그의 두 손은 사실 이태준에게 있어서 고맙기 그지없는 은인이자 외롭던 소년시대를 추억케 하
는 상징물인 셈이다.
그의 유년은 가난과 고통으로 얼룩져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태준은 다섯 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잃고,
여덟 살에는 어머니마저 잃은 천애 고아가 됐다.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 그는 할머니의 밑에도 오래 머
물지 못하고 친척집을 전전하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이태준이 기억하는 유년이
란, 대개가 구질구질하고 우중충한 시간의 조각들이다.
명절이 되어도 더부살이하는 그는 설빔 같은 것은 상상할 수조차 없었다. 다른 때는 다른 아이들 축에 끼
어 꿀릴 것 없이 놀다가도, 명절날만은 꾀죄죄한 자신의 몰골이 부끄러워 구석으로 아이들을 피해 다니며
하루를 다 보내기 일쑤였다. 그때의 설움을 이태준은 '명일날이 될 때마다 더운 때면 산기슭에서 추운 때면
남의 집 비인 사랑에 들어가서 혼자 놀고 때를 보내는 그 쓸쓸한 모양'이라고 쓰고 있다.
안협이라는 곳의 친척집에 있을 때, 어린 이태준은 꼬박꼬박 나무를 져 나르고 물을 길었다. 어느 날, 지
게도 없이 나무를 해오라는 말에 도끼 하나만 들고 산을 오른 그는 종일 팬 나무를 한 곳에 모아놓고 해거
름녘에 남의 지게를 빌어 나무 해 놓은 곳으로 올랐다. 그러나 분명 해 놓은 나뭇단이 보이지 않았다. 나뭇
단을 도둑맞고 터덜터덜 산을 내려온 이태준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나무는 않고 종일 어디서 놀다 왔냐는
친척 어른의 꾸지람이었다. 그가 아무리 사실을 이야기해도 주위에서 그의 마음을 알아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무를 잃어버린 것보다 꾸지람에 더 분을 느꼈던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런 그가 고아로서의 설움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소학교 졸업식 때였다. 성적이 우수했던 그는 우등상
을 타고 졸업생 답사도 하는 '빛나는 졸업생'이었지만, 졸업식이 끝난 뒤 졸업장과 상장과 상품을 안고 구
경시킬 이가 아무도 없어 친척집 사랑방에 돌아와 문을 걸고 종일 눈물을 흘렸다. 어머니를 생각하며 흘린
최초의 눈물이었다.
최고의 단편소설, 30년대 최고의 소설가
1930년대의 가장 뛰어난 소설가 중 하나로 불리는 상허 이태준은 1904년 11월 4일 강원도 철원군 무장
면 산명리에서 출생했다. 그의 작품에서 유독 가난한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게 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유년
체험과 깊은 연관이 있다. 개화파에 가담했다가 친일분자로 오인당한 망명객인 아버지를 따라 이역 땅인
블라디보스톡으로 이주한 이래, 이태준은 5살에 아버지를, 8살에 어머니를 잃고 함북 배기미, 철원 용담,
안협, 원산 등지에서 신산스러운 삶을 이어나갔다. 학창시절 이태준을 지탱시킨 것도 대부분 고학의 힘이었
다. 청년회관의 야학교를 다닐 때는 상점 점원생활로, 휘문시절에는 교장실의 청소를 하며, 일본 유학시절
에는 신문, 우유배달 등으로 학비와 생활비를 벌었다. 그러나, 힘든 생활 중에도 그는 문학에의 꿈을 잃지
않았다. 휘문고보 시절, 이태준은 학적부의 '기호 및 지망'란에 '문학'을 적어 넣었고, 실제로 교지인 《휘
문》 제 2호 발간시에는 학예부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이태준이 문단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1929년《개벽》사에 입사한 이후부터였다. 그의 등단은
1925년〈오몽녀 (五夢女)〉를 통해서였지만, 프로문학이 점진적으로 퇴조해가기 시작했던 시기에 역설적으
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이태준 문학의 최전성기는 1930년대이다. 그는 1930년 5월에 결혼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활동을 펼쳤다.
같은 해 중외일보 기자, 조선중앙일보 학예부장 등을 역임하며 카프가 주도해온 비문화적 정치주의와 입장
을 달리하는〈구인회〉모임에 참여하는 한편 이화여전 등 유수한 학교에 출강하며 바쁜 일상을 보냈다. 그
의 대표작이라 불리는 작품 대부분도 이 분주한 시기에 씌어졌다.
한편, 순수문학을 지향했던 이태준의 작품세계는 1938년 뚜렷한 갈등과 변화를 보인다. 객관적인 상황의
변화,《문장》지의 편집자로서 문단 전체에 가지는 책임감 등이 그를 짓눌렀을 이 시기 그는〈패강냉〉,
〈농군〉과 같은 작품을 발표했지만 그의 작품세계를 냉소하던 문단의 질시와 압력 때문에 이내 좌절한다.
결국 이태준은 고향인 철원 인근의 안협으로 낙향하여 낚시질로 소일을 하며 해방을 맞았다.
해방 후 그는 지금까지의 문학적 태도와는 달리 좌익계열의 문학단체에 적극 참여하며〈해방전후〉와 같
은 사상의 혁신을 보여주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1946년 7월경에 홀연히 월북했다.
북에서의 이태준의 행적은 그다지 자세히 알려져 있지는 않으나, '방소문화사절단'의 일원으로 소련을 방
문하고《소련기행》을 출간하고, 〈농토〉,〈첫전투〉 등의 작품을 창작하며 나름대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
다. 그러나, 작가로서의 이태준의 생명은 1953년 대대적인 남로당계 숙청으로 인해 사실상 끝나고 말았다.
소련파의 비호로 목숨은 부지했지만, 부르주아 반당사상의 잔재를 지닌 작가로 몰려 작가로서의 자격을 박
탈당했기 때문이다. 이후 그는 신문교정원, 파고철 수집노동자 등으로 전전하게 되는데, 그 이후의 만년의
행적에 대한 자료는 확실치가 않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
러시아의 해삼위와 함경북도의 배기미에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은 어린 송빈은 외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문중인 이씨 집안이 모여 사는 철원으로 들어가게 된다. 오래지 않아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던 외할머니와
도 떨어져 살게 된 송빈은 친척집을 전전하며 부모 없는 설움과 가난의 비참함을 온몸으로 체험하면서도
내일의 희망을 잃지 않는다. 추석날 우연히 만난 서울 소녀 은주는 그런 송빈의 희망을 부추기는 또 하나
의 인물이었다.
어려운 생활의 와중에도 봉명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송빈은, 그러나 자신에겐 함께 기뻐해줄 어머니가
없음을 비로소 깨닫고 슬픔에 잠긴다. 하지만 그 슬픔도 잠깐, 송빈은 다시 읍내의 농업학교로 진학한다.
하지만 그 답답한 생활을 견디다 못해 심부름값 60전을 들고 무작정 서울로 떠나게 된다. 무전취식을 하다
혼찌검이 나기도 하고 원산 객주집 잔심부름 노릇을 하는 등 갖은 고생 끝에 서울에 도착해 학교를 다니게
된 송빈은 드디어 꿈에 그리던 은주를 다시 만나게 되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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