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리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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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토마스 만
출판사
-
출판년도
2000.07
판매자(주)북코스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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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토마스 만의 정치관

20세기 전환기의 시대적 갈등이 토마스 만의 내면 세계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초기의 그의 정치적 견해
는 이러한 시대적 조류에 의해 비정치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가 작가로는 위대함을 인정받고 있지만 그
의 정치적 역할에 대해서는 상반된 입장이었다.
독일에서 토마스 만만큼 이중적 평가를 받는 작가도 드물다. 이러한 경향은 벌써 1920년대부터 지속되어
왔다. 하지만 그가 살아온 시대는 그를 침묵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1914년 8월 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토마스 만은 경악과 희망이 섞인 감정으로 전쟁을 맞이했다.
그는 8월 7일 형 하인리히 만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전쟁을 예견했다.
"이 전쟁으로 내 생활의 물질적 기반이 완전히 변화될 것 같아요. 전혀 예기치 않게 아주 엄청난 일을
체험할 수 있으니 고마운 일이 아닌가요?"
이때부터 정치적이고 급진적인 성향이 강한 형과 불화를 빚게 됐다. 그는 정치와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형이 독일문화를 매도하는 데 대해 독일문화의 정신적 아들로서 독일의 명예를 위해 정신적인 격투를 벌이
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이유로 집필 중이던 《마의 산》을 중단하고 국수주의적 입장에서 독일과 자신을
해명하고 정당화하고자 2년이 넘는 세월에 걸쳐 에세이를 쓴다. 이것이 바로 토마스 만의 에세이집 《비정
치적 인간의 고찰》이다.
《비정치적 인간의 고찰》은 국가와 정치에 대한 정신적 자율성의 주장이고 예술과 대중간의 경계를 짓는
것이며 정치적인 것을 중시하지 않는 심미주의에의 자기고백이었다. 시민계층을 보호하고 그것의 순수성,
위엄 및 휴머니즘을 보존하고자 했지만, 그는 독일 시민이 부르주아로 발전한 사실을 놓쳐버렸다고 고백한
다. 독일 시민과 교양 개념의 명예를 회복하려는 자신의 의도가 너무 늦었음을 그는 아쉬워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일을 시도한다. 그는 민주적인 문학이 밀어닥침으로써 휴머니즘 자체가 위협받는다고 여
겼다.

세계주의자이자 평화주의자인 토마스 만


그는 뤼벡에서 부유한 곡물상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시 참사위원을 지내다가 부시장이 된 인
물이었고, 어머니는 남미 출신의 미인으로 음악적 재능이 풍부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는 시민적 기질을,
어머니에게서는 예술가적 기질을 이어받았다. 그는 학교를 싫어했다.
16세 때 아버지가 죽자 백 년 동안 이어왔던 만(Mann)상회(商會)가 파산하고 어머니와 같이 뮌헨으로 이
주했다. 거기서 그는 화재보험회사의 견습 사원으로 있으면서 틈틈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후 로마에
체재하던 형의 권유로 이탈리아에서 일 년 동안 살게 됐다. 그동안 뮌헨 시절 이후의 단편을 모아 《작은
프리데만 씨 Der kleine Herr Friedemann》라는 표제로 출판했다. 이 시절의 단편들은 병자, 불구자 혹은
정신적인 결함이 있는 인물들이 시민적인 행복을 혹은 정신적인 세계의 즐거움을 추구하면서 파멸되어 가
는 과정을 그린 것이 많다.
1899년 뮌헨으로 돌아와 잠시 동안 주간지 《짐플리치스무스 Simplicissimus》 편집을 담당했고, 1900년
에는 장편소설 《부덴브로크가(家)의 사람들 Buddenbrooks》을 완성했다. 일가 4대에 걸친 몰락의 역사를
그린 이 작품으로 만(Mann)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1905년 만은 대학교수의 딸과 결혼하여 명성을
얻자 자유문필가로 생활했다. 이 무렵 명작 《토니오 크뢰거 Tonio Kroger》, 《대공전하(大公殿下)》,
《베니스에서의 죽음 Der Tod in Venedig》 등이 발표됐다.
1912년 부인이 폐결핵으로 스위스 다보스 요양소에 들어갔을 때, 그는 동반자로 따라가 거기서 한 달 동
안 머물렀다. 그때의 체험을 삽화로 모으려고 했는데, 그것이 점점 방대해서 12년 후에 완성된 것이 문학
적 정점을 이루는 《마(魔)의 산 Der Zauberberg》이다.
1929년에 토마스 만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그러나 점차로 나치의 위협을 느끼자 먼저 나치를 희화한
《마리오와 마술사 Mario und der Zauberer》를 발표했고, 이어 강연을 통해 나치의 위협성을 경고했다.
1938년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해 프린스턴 대학의 객원교수로서 강연 혹은 라디오 방송을 통해 인류의 적
나치 타도를 부르짖었다. 그리고 《바이마르의 로테 Lotte in Weimar》,《파우스투스 박사 Docktor
Faustus》 등을 발표했고, 1944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얻었다.
세계주의자요 평화주의자인 그는 전후 점진하는 동서의 대립을 유화시키기 위해 동구의 동서 평화회의에
참석하기도 했다. 미국이 반공 정책을 취하자 1952년에 미국을 떠나 유럽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동서로 분
리된 조국으로는 돌아오지 않고 스위스에 살면서 세계 평화와 동·서독의 통일을 위해 강연활동을 하면서
지내다가 1955년에 80세를 일기로 숨졌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

이곳은 요양원. 길게 쭉 뻗은 본채와 옆에 딸린 곁채로 이루어져 있는 일직선의 흰색 요양
원 건물은 널찍한 정원의 한가운데 자리잡고 있었다. 이 요양원은 주로 폐질환을 앓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곳이다. 하지만 폐병 환자들뿐만 아니라 시의원 부인인 슈파츠 여사처럼 위장 때문에 고생하는 사람
이 있는가 하면 심장에 이상이 있는 사람, 마비성 환자들, 류머티즘을 앓은 사람들, 그리고 온갖 증세를
보이는 신경증 환자들 등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온갖 부류의 사람들이 이곳에 머물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일종의 광물이나 보석 이름을 연상케 하는 이름을 가진 별난 작가가 이곳에서 아까운 세월을 축내고 있었
다.
어느날 를 경영하는 대상인 클뢰터얀 씨가 부인을 요양원으로 데려왔다.
그 부인은 아름다움과 고상함을 간직한 여성이었다. 도착하자마자 요양원 사람들은 온통 그녀에게 관심이
쏠려 있었다.
새로운 사람이 온 후 처음으로 요양객 일동이 참석하는 첫 식사 때의 일이었다. 몇 주 전부터 요양원에 묵고 있는 작가 슈피넬이 여지없이 그날도 남들보다 늦게 식당에 도착했다. 그는 나지막한
소리로 좌중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 자리 맞은편에 클뢰터얀 부인이 앉아 있는
것을 발견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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