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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십자군 전쟁과 배경
1.1. 이슬람 세력의 팽창과 서유럽의 반응
이슬람 세력의 팽창과 서유럽의 반응은 십자군 전쟁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6세기부터 8세기 초까지 놀라운 속도로 세력을 확장한 이슬람은 7세기 중엽까지 시리아, 사산조 페르시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동으로는 중앙아시아와 인더스 강 유역, 서로는 카르타고와 711년 에스파냐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10세기부터 11세기 무렵까지 에스파냐의 그리스도교 국가들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면서 이슬람세계를 점차 압박하였고, 11세기 말경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일부 지역에서만 이슬람세력이 잔류하게 되었다.
한편 유럽 대륙의 상황을 보면,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와 1077년 '카노사의 굴욕'이 십자군 전쟁의 배경이 되었다. 1071년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군이 비잔틴 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를 포로로 잡아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고, 이후 셀주크 투르크가 중동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1077년에는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의 대립을 상징하는 '카노사의 굴욕'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교황권은 일시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지만, 하인리히 4세는 궁극적으로 교황을 몰아냈다.
이처럼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이 모두 위기에 처하게 되자, 두 세력이 힘을 합쳐 이슬람의 팽창을 저지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특히 1081년 알렉시우스 콤네노스가 동로마 제국의 황제에 즉위하면서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서유럽의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이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기회로 판단하여 1095년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십자군 원정을 제창하게 된 것이다.
1.2. 동로마 제국의 위기와 서유럽의 지원 요청
동로마 제국은 11세기 초까지는 바실리우스 2세의 지휘 하에 동유럽과 중동에서 막강한 세력을 떨쳤으나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연달아 무능한 13명의 황제가 난립하며 혼란과 쇠퇴를 가져왔다. 이 무렵에 동로마 제국의 국고는 탕진되고, 지방귀족의 세력이 확장하여 군대의 핵심인 자유농민이 예농화되었으며, 중앙정부의 세력은 상대적으로 약해졌다. 동쪽에서 셀주크 투르크가 침략하면서 제국은 위기에 처했다. 1071년의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군이 비잔틴 군을 격파하고 로마누스를 포로로 잡았다. 이로써 니케아, 안티오크 등 아나톨리아의 대부분이 셀주크의 손에 들어갔고, 셀주크 투르크는 이집트를 제외한 중동을 장악하게 된다. 이 무렵 6년 뒤, 유럽에서는 '카노사의 굴욕'이 일어났다. 로마 교황과 독일 황제의 대립을 상징하는 이 사건은 결국 하인리히 4세가 카노사에서 교황에게 머리를 숙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이로써 교황권이 최종 승리를 거둔 것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4세는 절치부심하며 클레멘스 3세를 대립교황으로 내세운 뒤 1082년에는 로마를 공격하여 그레고리를 내쫓아 버린다. 이처럼 두 로마가 모두 위기에 처한 가운데, 서로 힘을 합쳐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이미 1073년에 그레고리 교황이 비잔틴에 사절을 파견하여 '이베리아 반도에서부터 일리리쿰, 팔레스타인에 이르기까지, 이교도들을 몰아내는 일에 협력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 뒤 비잔틴에서는 1081년에 알렉시우스 콤네노스가 황제에 즉위했다. 그는 제국의 위기에 때맞춰 등장한 영명한 군주로서 나중에는 자력으로 셀주크를 물리치고 아나톨리아의 영토를 대부분 수복하게 되지만, 당시는 콘스탄티노플까지 위협을 받고 있던 처지였다. 그래서 그는 서유럽 쪽에서 '용병'을 얻자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알렉시우스가 보낸 사절이 1095년, 피아첸차 공의회에 참석하여 '이교도와의 전쟁에 힘을 빌려주기 바란다'는 뜻을 전하자, 우르바노 2세 교황은 이를 기회로 판단했다. 자신이 치켜든 깃발 아래 전 유럽의 봉건영주와 기사들이 움직인다면, 세속군주들과 대립교황의 압박으로 권력과 권위가 모두 위협받고 있던 교황의 입지를 단숨에 끌어올릴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8개월 뒤인 11월 18일, 클레르몽 공의회에서 마침내 '십자군'을 제창한다.
1.3. 십자군의 다양한 참여 동기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한 욕망에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십자군 원정에 가담하였다"" 서유럽 세계는 봉건제가 9세기 이후 전성기를 맞이하여 서유럽 토지의 거의 모든 부분이 영주들에게 분배되어 있었기에 분배해줄 수 있는 땅이 부족했다. 귀족들은 점차 안정되고 장자상속제가 널리 수용되면서 차남 이하의 귀족 자제들은 자신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