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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체실험의 역사와 윤리
1.1. 고대의학에서 인체실험 및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
고대의학에서는 인체실험이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알렉산드리아(Alexandria)의 헤로필루스(Herophilus)와 에라시스트라투스(Erasistratrus)는 BC 2세기에 살았던 의학자로, 신경계의 존재를 발견하고 해부학 용어의 기반을 마련했다. 이들은 강력한 프톨레미(Ptolemy) 왕가의 지원을 받아 사형수들을 대상으로 생체해부를 수행했다. 이들은 자신들의 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세 가지 논거를 제시했는데, 1) 사형수들에게만 생체해부를 했다는 점, 2) 당시 생체해부가 의학지식 획득에 필수적이었다는 점, 3) 소수의 죄인들의 희생으로 대다수에게 이익이 되는 과학 활동이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고대 의학자 켈서스(Celsus, AD 1세기)는 이들의 생체실험을 "Medical murderers(의학의 이름으로 살인하는 자들)"이라고 비판했다.
한편 히포크라테스(BC 4세기)는 환자들의 복리에 주된 관심을 두었다. 그는 "연구, 진단, 및 치료 등, 의료와 관련된 어떤 경우에라도 환자에게 해를 주지 말라"는 대원칙을 제시했다. 그의 저서 "Aphorism"에는 "Experiment is perilous(실험은 위험하다)"라는 구절이 있는데, 이는 "테스트를 통해 증명되지 않은 치료법 등을 인체에 시험해 보는 것은 위험하다. 나쁜 실험은 신체 전체를 파멸시킬 만큼 위험하기도 하다"는 경고로 해석된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의 윤리는 개인주의에 입각한 것으로, 공리주의 원칙에 입각한 인체실험의 논리와는 다른 맥락을 가지고 있었다.
이처럼 고대 의학에서는 인체실험이 이루어졌지만, 윤리적인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인체실험에 대한 경고와 함께 환자 복지 중심의 윤리적 기준을 제시했다.
1.2. 근대 서양의학의 발전과 인체실험
19세기를 통해 근대 실험의학이 발전한 이래 동물 생체실험과 인체실험이 급증하였다. 특히 임상과학이 발전하면서 대학병원의 임상의사들(그들은 대개 임상의학 연구자이기도 했음)은 규제할 법규가 없는 가운데, 환자들을 실험대상으로 삼았다. 그들은 "Bedside"를 의사들의 "Laboratory"라고 불렀으며, 질병을 "Nature's experiment"라고 불렀다.
단순한 관찰(Observation)을 넘어 그들은 환자의 질병에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실험을 하거나, 환자의 치료와는 상관없는 시술을 통해 의학 지식을 넓히려고 하였다. 프랑스생리학자 클라우드 버나드(1813-1878)는 실험의학의 철학적 기초를 놓았고 인체실험에 대한 명확한 윤리적 기준을 제시하였다. 1865년에 "인체실험은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으나, 인체에 고통이나 어떠한 종류의 해를 가하지 않을 경우에만 가능하다. '과학의 진보'는 사람의 복지에 위협을 가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한다."라고 밝혔다.
1907년 William Osler는 미국 의사협회 대회에서 "모든 새로운 치료법은 인체실험을 거친 뒤 사용되어야 한다. 단 동물실험을 통해 '절대안전'이 보장된 이후에, 상황에 대해 모든 정보를 받은 환자의 'full consent'를 받은 뒤 인체실험을 할 수 있다. 우리에게 치료를 위탁한 환자들에게 직접 이익이 없는 한, 우리는 그들을 실험 목적으로 사용할 수 없다. 이것들이 지켜지지 않았을 경우, 환자와 의사를 엮는 신성한 끈은 끊어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1) 자가 인체실험(Autoexperimentation)
의학연구자가 환자나 일반인을 상대로 인체실험 하기 전에 실험자 자신의 몸이나 그의 가족, 또는 연구팀의 일원의 몸에 실험하는 것이다. 이는 인체실험의 역사만큼 오래되었으며, 일반적인 인체실험보다 윤리적으로 인정되었다.
제너(Edward Jenner), 존 헌터, 심슨 (James Simpson), 할스테드(William S. Halsted), 포스만 (Werner Forssman), 월터 리드(Walter Reed), 이호왕교수, 서울의대 기생충학교수들 등이 자가 인체실험에 참여하였다. 또한 파스퇴르 (Louis Pasteur), 쉐링턴(Charles Sherrington), 할스테드(William Halsted), 쿠싱 (Harvey Cushing)과 같은 의사들은 응급상황에서 실험적 투약을 했던 경우도 있었다.
(2) 세균학의 발전과 인체실험
1870년 이후 코호(Robert Koch)와 파스퇴르에 의해 세균학의 기초가 놓인 이래 의학자들의 연구는 세균학이 중심이 되었다. 이 시기를 "BACTERIOMANIA" 또는 "germ theory"의 유산으로 일컫는데, 적절한 실험동물을 찾지 못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시설에 수용된 사회의 약자들에게 비인간적인 실험이 많이 행해졌다. 한센(G.A. Hansen), 나이세르(A. Neisser), 스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