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서론
분석심리학자 칼 구스타프 융(1875-1961)은 S. 프로이트(1856-1939)나 다른 어느 심층 심리학자들보다 종교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가 종교라고 생각했던 것은 우리가 보통 종교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종교라는 단어에서 기독교나 불교, 이슬람교 등 어떤 특정한 종파를 의미하거나, 그 교단들에서 믿고 있는 신조(credo)를 가리켰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신(神)이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 어떤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를 체험하고, 그 결과 사람들의 의식이 변화된 상태, 또는 변화된 의식에서 나오는 어떤 특별한 정신적인 태도를 의미했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종교란 사람들이 그들의 삶을 온통 흔들어 버릴 수 있는 어떤 강력한 존재를 만나고, 그 존재를 만난 다음에 삶이 변화되고, 그 전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을 가리켰던 것이다. 이런 생각에서 융은 오늘날 기독교는 현대인들의 삶에 별로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으며, 그들의 영혼에 깊숙이 스며들지도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그가 현대의 종교적인 상황, 특히 기독교의 영적인 상황을 이렇게 비판적인 눈으로 바라보는 것은 근래에 들어와서 기독교가 현대인들의 영적인 욕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으며, 현대인들의 영적인 고통을 달래주지도 못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종교의 가치가 극심한 도전을 받고 있던 지난 세기말, 어떤 것이 융으로 하여금 종교와 종교현상들에 그렇게 깊은 관심을 기울이게 했는가? 그의 삶에는 넓은 의미에서 종교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체험들이 많이 있었으며, 그것들은 그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우리가 그의 심리학 사상, 특히 종교적인 현상과 관련된 분석심리학 사상을 살펴보려면 먼저 그의 삶을 조명해 보아야 할 것이다.
2. 융의 생애
2.1. 유년시절
융의 유년시절은 그의 후일 사상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융은 1875년 7월 6일 스위스 트루가우 주 케스빌에서 개신교 목사 요한 폴 아킬레스 융과 에밀리 부인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융의 어린 시절은 그리 밝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부모의 갈등 속에서 자라났기 때문이다. 특히 융이 세 살 때 어머니가 장기간 병원에 입원하면서 그는 더욱 큰 심리적 불안을 겪게 되었다.
융의 유년시절에는 크게 세 가지 요인이 그에게 영향을 끼쳤다. 첫째, 부모의 불화이다. 융은 부모를 모방의 대상이 아닌 그들의 심판자와 같은 입장에서 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나에게 일종의 자아 팽창을 가져왔으며, 삶에 대한 내 신뢰감을 근본에서부터 허물게 만들었다."라고 융은 당시의 상황을 토로했다. 이로 인해 그는 다른 사람들과 떨어져 자기 내면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게 되어 자기애적인 내향성을 지니게 되었다.
둘째, 어머니의 장기간 입원으로 발생된 삶에 대한 근본적인 신뢰의 부족이다. 이는 삶과 여성적인 것과 따뜻한 것에 대한 상실을 의미하고, 이 상실은 융에게 존재의 심층은 연약하며 믿지 못할 것임을 일깨워 주었으며, 삶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감을 심어 주었다.
셋째, 외로움에 점철된 시절이다. 이로 인해 그는 언제나 무엇인가를 혼자서 해야 하는 외로운 성격으로 형성되어 갔다. 융은 어린 시절 중에서 특히 밤을 무서워했는데, 이는 자신의 외로움과 일치하는 것이었다. 융에게 밤은 공포의 대상이었으며, 검은색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보여주었다. 아버지의 검은 가운 또한 융에게 긍정적인 기억이 되지 못했다.
융의 내면에는 밤-검은색-아버지-기독교 등 부정적인 이미지의 고리에 죽음의 이미지가 덧붙여지면서 이 모든 것들이 무엇인가 위험하고, 신뢰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가져다주었다. 또한 열 살 무렵 융은 자신의 내면에 또 다른 인격이 있지 않은가 하는 내면적 분열을 겪었다. 이때부터 융은 자신의 내면에 무의식을 발견하고 진정한 자신의 모습은 무엇인가를 탐구하게 되었다.
요컨대, 융의 유년시절은 불안정한 가정환경, 어머니의 부재, 깊은 외로움 등으로 점철되어 있었으며, 이는 그의 성격 형성과 후일 사상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경험을 통해 융은 내면에 잠재된 또 다른 자아와 무의식의 존재를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2.2. 청소년기와 청년기
융의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그의 성격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청소년기에 접어든 12살 무렵 융은 운명적인 사건을 겪었다. 학교에서 집으로 가던 길에 넘어져 머리를 다치게 되었는데, 이때 아버지가 "융이 건강하지 못해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이야"라고 한 말에 충격을 받았다. 이 사건은 융로 하여금 삶의 과제와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 계기였다.
같은 무렵 융은 신비적 누미노제를 체험하기도 했다. 아름다운 성당에 배설물이 떨어져 성당이 무너지는 환상을 통해 내면적 정신 에너지의 해방감을 경험했다. 이 체험은 융 자신의 열등감이나 초라한 이미지를 극복하게 해 주었고, 하나님과 완전히 하나가 되었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했다.
중학교 시절 융은 자신 내면에 또 다른 인격이 있음을 분명히 느꼈다. 이상적인 모습을 '제1인격', 실제의 모습을 '제2인격'이라고 불렀다. 이 때 융은 쇼펜하우어와 칸트를 읽었고 많은 종교 서적도 탐독하며 정체성 확립에 힘썼다.
고등학교와 대학교 시절 융은 자연과학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종교 현상에 대해서도 깊이 탐구했다. 이를 통해 정신과를 전공하고 정신과 의사의 길을 걷기로 결심했다.
이처럼 융의 청소년기와 청년기는 그의 성격 형성과 정신적 발전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다양한 체험과 학문적 탐구를 통해 융은 자신만의 독특한 사상과 이론을 구축해 나갈 수 있었다. 이는 이후 그가 정신의학 분야에서 독보적인 업적을 남길 수 있는 근간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2.3. 정신과 의사로서의 활동과 실존적인 위기
이 시기는 융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시기이다. 그 이유는 그의 심리학 사상이 이때 결정적으로 형성되기 때문이다. 이 때 그는 그의 심리학 사상에서 가장 결정적인 개념이 되는 개성화 과정을 체험하게 된다.
우리는 이 시기를 둘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 시기는 1900년부터 1913년까지 정신과 의사로서 첫발을 내딛는 시기이고, 1913년부터 1919년까지는 프로이트와 헤어진 다음 그의 삶에 실존적인 위기를 겪게 되는 시기이다.
첫 번째 시기 당시 정신의학은 정신과 환자들의 내면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상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융은 정신과 환자들의 증상에 내포되어 있는 의미를 탐색하면서 치료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1903년부터 사람들의 연상 속에는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음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탐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융은 프로이트와 만나게 되었고 그의 심리학에 심취하게 되었다. 그렇지만 융은 프로이트에게서 성(性)이 일종의 누미노제적인 실체라는 느낌을 받았다. 융은 도대체 프로이트가 성적인 외상(外傷, trauma)이 모든 억압의 근본적인 원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에 대해서 수긍할 수 없었다. 프로이트 역시 융의 이런 반발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정적으로 융과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이 1912년 "리비도의 변형과 상징"이라는 논문을 발표한 때이다. 이 논문 속에서 융은 그 나름대로의 근친상간에 대한 사상과 리비도의 변형에 관해서 역설했다. 융은 여기에서 성적인 것들을 상징으로 생각하지 못하고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파악했다고 프로이트를 비판한다.
프로이트와의 헤어진 이후 (38세 이후)융은 내면의 불확실성 속에 사로잡혀 지내게 되었다. 이제는 스스로 모든 것을 이룩해 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때 융은 많은 꿈들과 비전을 보게 되었고 그것을 스스로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했다. 그것이 잘 이루어지지 않을 때는 무의식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 어린 시절의 놀이인 돌맹이로 집짓기를 어른이 되어서도 빠져 들어가곤 하였다. 그 속에서 그는 인간 정신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무의식이 가진 치유의 힘을 체험하게 되었다.
1916년(41세) 어느 날, 그는 그의 내적인 체험을 창조적으로 형상화시켜야 하겠다는 강력한 내면의 요청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자를 위한 일곱 개의 설교"를 썼으며, 만달라를 최초로 그리게 되었다. 융은 만달라를 그려가면서 그의 인격의 전체성이 점차 이루어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