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내용
1. 요고와 장고의 역사
1.1. 요고의 의미
요고(腰鼓)는 삼국시대 및 통일신라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타악기로, 세요고(細腰鼓)라고도 한다. 크기가 매우 작으며 몸통 양편에 북면이 달려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연주자는 이 몸통을 무릎 위에 올리고 앉아 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요고는 2014년 진도 앞바다에서 최초로 발굴되었고, 2017년에는 세종시에서 백제의 요고가 출토되어 그 사용이 적어도 5세기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요고는 삼국시대에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악기였던 것으로 보인다.
1.2. 요고의 역사
1.2.1. 고구려의 요고
고구려에서는 요고가 노래 "고려가"에서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고구려 고분벽화 중 악기를 연주하는 모습을 표현한 주악도에서도 요고를 묘사한 그림이 있어, 적어도 고구려 시대 중 어느 시점(6세기 전후)에는 요고가 완전히 정착한 것으로 생각된다. 고구려의 기록에서 "요고"라는 명칭을 찾아볼 수 있으며, 수나라 및 당나라의 기록에서 고구려 요고와 관련한 언급이 있다. 이를 통해 고구려에서 요고가 사용되었음이 확인된다.
1.2.2. 백제의 요고
백제의 요고는 백제 시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타악기이다. 백제와 관련한 문헌 기록에는 요고라는 명칭이 정확히 사용된 것은 없으나, 등이나 고려 시대 김부식의 등에서 백제에서는 일곱 가지 악기 – 고(鼓, 타악기)·각(角, 뿔로 만든 관악기)·공후(箜篌, 서양의 하프와 유사한 현악기), 쟁(箏, 목재로 된 긴 현악기), 우(竽 , 관악기), 지(篪, 가로로 부는 관악기), 적(笛, 관악기)가 사용되었다고 기록되고 있다.
다만 백제 7세기 유물인 부조에서 요고와 비슷한 형태의 악기를 확인할 수 있어, 비록 백제의 7악기 중 "고"와 "요고"가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지는 확답할 수 없으나 적어도 요고형 악기가 백제에 수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요고는 통일신라 시대까지 계속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1.2.3. 통일신라의 요고
통일신라 시대에도 요고가 지속적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통일신라 유물에서 요고가 계속적으로 발견되고 있으며, 이는 삼국시대부터 이어져 온 타악기 요고가 통일신라 시대까지 이어졌음을 보여준다. 특히 통일신라의 감은사지 서삼층석탑 사리기에서 요고를 묘사한 부조상이 발견되어, 이 시기에도 요고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요고는 삼국시대로부터 통일신라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전해져 왔으며, 중요한 타악기로서의 역할을 해왔다고 볼 수 있다.
1.3. 장고의 의미
장고(杖鼓)란 장구라고도 하며, 한국의 대표적인 타악기이자 절주악기에 해당한다. 장고는 통 두 개를 연결한 몸통을 갖고 있으며, 이 몸통의 양편에 가죽을 메어 때릴 수 있는 면을 만든다. 오른손은 대나무로 만든 열채를 잡고 오른편의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맨손이나 또는 궁굴채(끝에 동그란 나무공이를 단 채)로 북편을 치는 형태이다 – 정악에서는 맨손으로 북편을 치고, 농악에서는 궁굴채로 북편을 친다."
1.4. 장고의 역사
1.4.1. 고려의 장고
고려 시대부터 장고가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장고 또는 장구의 원형은 앞서 살펴본 요고로 보며, 통일신라 시대에까지 이어졌던 요고가 점차 그 크기가 커지면서 장고형으로 변해갔던 것으로 추정한다. 통일신라 시대의 요고와 관련한 기록이나 유물에서 요고를 연주하는 손의 위치가 오늘날 장고를 연주하는 손의 위치와 비슷하게 변해가는 점 역시 요고를 장고의 원형으로 볼 수 있으며 고려시대에 장고가 등장하게 된 배경으로 해당 시대를 이해할 수 있다.
장고에 대해서는 고려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기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문종 30년의 기록에 따르면 장고를 담당하는 "장고업사(杖鼓業師)"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며 고려시대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중요한 업무를 수행하는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예종 9년에는 송나라에서 장고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 음악에서 장고를 편성하여 사용하였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청자로 만든 장고와 흑유로 만든 장고 등 여러 장고가 고려 시대 유물로서 현전하고 있다.
이처럼 장고는 고려 시대부터 궁중 음악에서 중요한 악기로 활용되었으며, 그 연주법과 다양한 형태의 장고도구들이 기록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를 통해 고려 시대에 장고가 이미 발달한 악기였음을 알 수 있다.
1.4.2. 조선의 장고
조선의 장고는 통일신라 시대에 이어 고려 시대에 더욱 발달하였다. 장고(杖鼓)는 통 두 개를 연결한 몸통을 갖고 있으며, 양편에 가죽을 메어 때릴 수 있는 면을 만든다. 오른손은 대나무로 만든 열채를 잡고 오른편의 채편을 치며, 왼손으로는 맨손이나 또는 궁굴채(끝에 동그란 나무공이를 단 채)로 북편을 치는 형태이다.
『고려사』에 따르면 문종 30년(1076년)에는 장고업사(杖鼓業師)가 대악서 관현방에 근무하며 고려 시대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중요한 직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예종 9년에는 송나라에서 장고를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어, 왕실 음악에서 장고를 편성하여 사용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청자로 만든 장고와 흑유로 만든 장고 등 여러 장고가 고려 시대 유물로 현전하고 있다.
조선 시대에도 장고는 중요한 악기로 활용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총 23곳에서 장고에 대해 기록하고 있으며, 특히 성종 시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에 장고의 유래와 연주법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오른손에 채를 잡고 왼쪽을 손으로 쳐서 연주하는 장고 연주법이 이미 성종 시대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고의 연주법이 "쌍(합장단)", "편(채편)", "고(북편)", "요(굴림채)" 등으로 구체적으로 기술되어 있어, 오늘날 장고 연주에서 사용되는 다양한 주법들이 이 시기부터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장고는 고려 시대부터 궁중음악의 핵심 악기로 사용되었으며, 조선 시대에도 지속적으로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며 발전해왔다. 특히 성종 시대에 편찬된 『악학궤범』을 통해 당시 장고의 구체적인 연주법과 음악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2. 나례, 성황제, 두레 및 재인청
2.1. 나례
2.1.1. 나례의 의미
나례(儺禮)란 나희(儺戱), 구나(驅儺), 대나(大儺) 등이라고도 불리며 궁궐에서 정기적으로 치러지던 의례 중 하나이다. 나례의 목적은 잡귀를 쫓아내기 위한 벽사(辟邪)로, 즉 한 해 동안 궁궐에 묵어 있던 귀신이나 재앙을 쫓아내고 새로운 기운을 맏아들이기 위해 매년 음력 섣달 그믐마다 나례를 지냈다. 민중도 섣달 그믐에 벽사 행위의 일부로 부뚜막이나 지붕을 수선하고 가축 우리와 집안을 정돈하는 등으로 오래 된 흔적을 닦아내는 행위를 했으며, 새해를 맞이하는 자정에는 사귀 및 악귀를 모조리 쫓아내기 위해 폭죽을 터뜨렸다. 궁중에서도 이처럼 벽사 의례로서 나례를 거행하였는데, 아마도 한반도의 궁중 나례는 고려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전래되어 오면서 정착된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2.1.2. 나례의 형식
나례는 음악과 춤, 폭죽을 모두 동반하는데 특히 붉은 옷을 입고 가면을 쓰며 춤을 추는 등으로 축귀(逐鬼)의 목적이 뚜렷한 행위가 함께 치루어졌다. 벽사 행위를 대표하는 무용 중 하나인 처용무가 나례에서 추어졌다는 기록이 있고, 또한 동물 또는 동물을 대신하는 인형을 희생양으로 바쳤다는 기록도 있다. 유교를 국본으로 삼는 조선 시대에 궁중 나례가 폐지될 것이 여러 번 논의되기도 하였지만 조선 중기까지 "대나", 즉 대대적인 나례 행사가 지속되었으며 조선 후기 비록 그 규모는 축소되었지만 나례는 여전히 이어지게 되었다. 또한 나례는 섣달 그믐만이 아니라 왕실 행차, 관리 부임 등 축하가 필요한 행사에서 행해지기도 하는 등, 점차 벽사 행위가 아니라 일종의 연희 내지 놀이로 변화하게 되었고 나례를 담당하는 사람들 역시 민가의 광대, 재인, 희자 , 기녀 등이 담당하게 되는 바 이 시기에는 나례를 "나희"나 "잡희"라고 부르게 된다."
2.2. 성황제
2.2.1. 성황제의 의미
성황제(城隍祭)란 마을 단위로 거행되던 신앙 행위이자 제의로, 마을 공동체가 함께 모시는 수호신인 성황신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성황제 내지 서낭제에 대해서는 그 유래에 대하여 몇 가지 다툼이 있지만, 일반적으로 성황제가 아니라 서낭제라고 할 때에는 중국의 성황 신앙에 영향을 받은 행위로 본다. 성황 신앙은 한반도의 삼국시대인 위진남북조 시대에 발달한 신앙 중 하나로, 이후 당나라와 송나라를 거쳐 중국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통일신라는 당나라와, 고려는 송나라와 그 교류가 매우 활발했기에 이러한 교류를 통해 성황 신앙이 건너온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렇듯 성황제는 지역의 수호신에게 제사를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