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성균관대 답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1. 성균관의 개요
1.1. 성균관의 의미와 역사
1.2. 성균관의 건축구조와 기능
1.3. 성균관에서의 유생들의 생활
2. 성균관의 시설과 기능
2.1. 대성전(문묘)
2.2. 명륜당
2.3. 동재와 서재
2.4. 기타 건물
3. 성균관 답사 소감
3.1. 성균관의 전통과 현대의 공존
3.2. 성균관의 역사성과 상징성
3.3. 성균관의 관리와 보존 상태
4. 성균관과 유생들
4.1. 유생들의 학문과 생활
4.2. 유생들의 정치적 참여
4.3. 유교 교육의 전통 계승
5. 성균관의 현대적 변화
5.1. 성균관에서 성균관대학교로
5.2. 유교 교육의 현대적 의미
5.3. 성균관의 문화재적 가치
6. 참고 문헌
본문내용
1. 성균관의 개요
1.1. 성균관의 의미와 역사
성균관은 조선시대 최고의 국가 교육기관이었다. 그 이름의 의미는 "인재를 이루어 풍속을 고르게 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성균관의 역사는 고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려 충렬왕 때인 1289년에 당시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국자감(國子監)의 명칭을 '성균'이라는 말로 개칭하면서 시작되었다. 충숙왕대인 1308년에는 '성균관'으로 개칭되었고, 공민왕대에는 국자감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가 1362년에 다시 성균관이 되었다.
조선 건국 이후에도 성균관이라는 명칭이 그대로 유지되어, 1395년부터 새로운 도읍 한양의 숭교방(崇敎坊) 지역에 대성전(大聖殿)과 동무(東탸)·서무(西탸)·명륜당(明倫堂)·동재(東齋)·서재(西齋)·양현고(養賢庫) 및 도서관인 존경각(尊敬閣) 등의 건물이 갖추어지면서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이렇듯 성균관은 고려 시대부터 조선 시대까지 연결되는 긴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며, 한국 최고의 국가 교육기관으로 여겨져 왔다고 할 수 있다.
1.2. 성균관의 건축구조와 기능
성균관의 건축구조와 기능은 크게 대성전을 중심으로 한 제향공간과 명륜당을 중심으로 한 강학공간으로 구분된다." 대성전은 공자와 중국 및 우리나라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모셔놓고 봄·가을로 석전대제를 지내는 문묘이다.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25칸 규모의 다포 양식 건물이며, 팔작지붕에 월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한편 명륜당은 성균관의 학자들이 유생들을 가르치는 교육공간으로, 과거시험장으로도 활용되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9칸 규모로 익공계의 다포 양식이며, 맞배지붕에 월대가 있다. 특히 명륜당은 성균관의 중심에 위치하여 대성전과 함께 성균관의 세로축을 형성하고 있다. 이 밖에도 양재, 존경각, 비천당 등의 전각들이 성균관의 주요 건물들이었다. 즉 성균관은 제향과 교육이라는 두 가지 핵심 기능을 수행하기 위한 건축구조를 갖추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1.3. 성균관에서의 유생들의 생활
성균관에서의 유생들의 생활은 매우 엄격하고 규율 있는 모습이었다. 유생들은 이른 새벽부터 북소리에 맞춰 일어나 의관을 갖추고 강의를 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특히 성균관의 주된 공간인 명륜당에서는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을 중점적으로 공부하고 암기했으며, 하루 중 여러 번의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유생들은 성균관이라는 공간 안에서 식사와 거처를 해결했는데, 동재와 서재에서 기숙사 생활을 하며 식사는 진사식당에서 했다. 유생들의 출결 역시 엄격하게 관리되었는데, 아침저녁으로 출석을 체크하여 원점 300점을 넘어야 대과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또한 성균관 유생들은 정치적으로도 적극적이었다. 국가 정책에 대해 잘못된 점이 있다고 판단하면 상소를 올리거나 동맹 휴학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이들은 "청론"이라 불리며 왕과 조정에서 큰 존중을 받았다. 하지만 이런 정치적 참여로 인해 유생들은 윤택한 생활보다는 엄격한 생활 규율을 따라야 했다.
결국 성균관은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유교 윤리와 학문을 기반으로 한 엄격한 생활 공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2. 성균관의 시설과 기능
2.1. 대성전(문묘)
대성전(大成殿)은 공자를 비롯한 유가의 성현들의 위패(位牌)를 모셔놓고 1년에 2회 정기적으로 석전대제(釋奠大祭)를 지내는 건물이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를 통칭하여 문묘(文廟)라고 한다.
대성전에는 공자와 안자(顔子)·증자(曾子)·자사자(子思子)·맹자(孟子) 등의 4성과 10대제자, 중국 송나라의 대표적 성리학자 6인 등 21위가 모셔졌으며, 동·서무에 우리나라의 18위와 중국의 유학자 94위 해서 112위를 모셨다. 문묘 전체로 보면 총 133위가 모셔진 것이다.
그러나 1949년 문묘 배향(背向) 성현에 대한 조정작업을 통해, 동·서무에 있던 우리나라의 18현(賢)의 위패는 모두 대성전으로 옮기고, 중국의 위패는 모두 태워 땅에 묻었다. 이에 따라 현재 성균관 문묘에는 원래 대성전에 있던 21위와 우리나라의 18위를 합쳐 모두 39위가 모셔져 있다.
대성전의 규모는 정면 5칸, 측면 5칸으로 총 25칸이며 다포 양식으로 이루어졌다. 지붕은 팔작지붕 형태이며, 월대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현판은 조선 중기의 명필가 한석봉의 글씨라고 전해진다.대성전은 공자와 여러 유교 성현들의 위패를 모신 공간으로, 매년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석전대제가 거행되는 조선시대 최고의 유교 사당이다. 대성전과 동무·서무로 구성된 문묘는 성균관의 중심 공간으로, 유교 이념을 구현하고 계승하는 상징적 장소였다. 이러한 문묘는 조선시대 지방 향교의 모범이 되었으며, 건축적 가치 또한 높이 평가받고 있다.
2.2. 명륜당
명륜당은 성균관의 학자들이 유생을 가르치는 교육공간이었다. 또한 과거시험이 있을 경우 과거시험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명륜당은 사실상 성균관의 중심에 위치하여, 대성전과 함께 성균관의 세로 축을 형성하는 전각이었다.
명륜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9칸이었으며, 익공계의 공포 양식으로 이루...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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