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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일제강점기 기독교 여성운동
1.1. 일제강점기 여성운동의 배경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유교 질서의 해체가 본격화되었고, 조선에 대한 일제의 무단강점이 시작되면서 민족적·문화적 자주성이 침해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종교의 자율성, 특히 기독교 여성들의 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기독교 여성 지도력의 양상도 분화되기 시작하였다.
1.2. 계몽운동을 주도한 김활란
김활란은 일제강점기 시대에 활동한 기독교 여성 지도자로, 이화 여학교를 대학으로 발전시키고 전국 각지를 돌며 농촌 계몽과 복음 전도 활동을 하였다. 1920년에는 이화 전도대를 결성하여 활동하였으며, 1920~30년대에는 YWCA를 기독교청년회 여자부에서 독립시켜 조선 여자기독교청년회 연합회를 창립하고 세계 YWCA 대회에 조선이 승인되도록 노력하였다.
이를 통해 YWCA는 조선 여성의 권익 옹호, 각종 계몽 활동, 강연, 전도 활동을 하며 여자 기독교인 선교사업의 활성화와 여자들의 문맹 퇴치, 교육 활성화, 사회활동 참여, 남존여비의 인습 타파, 의복 개량 등을 지원하여 여성들의 인권 활동에 힘썼다. 또한 1925년에는 "여성이여, 어서 앞으로 나가자!"라는 구호 아래 잡지 '여론'을 발간하였고, 잡지 표지에 김활란의 단발머리가 실려 있어 여성의 사회적 역할에 초점을 두고 신체적인 변화를 통해 여성 운동 참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일제의 전시체제기가 도입되면서 김활란은 일제의 정책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주관하는 친일 단체인 방송선전협의회, 조선부인 연구회, 애국금차회 등에 참가하였고, 특히 애국금차회를 통해 상류층 여성들과 함께 조직하여 금을 모아 일제의 국방비로 헌납하는 운동을 하였다. 또한 신사참배와 태평양 전쟁 시기에 전쟁 동원 정책, 황국신민화 운동(민족동화정책)에 적극 참여하는 등 일제 정책에 협력하는 친일파로 활동하였다.
이처럼 김활란은 초기에는 근대적 신여성을 실현하기 위해 계몽운동에 주력하였으나, 점차 학교의 존속과 사회적 지위의 보전에 몰두하게 되어 체제 순응형 지도자로 변화하였다.
1.3. 독립운동에 헌신한 김마리아
김마리아는 일제강점기 시대를 살아온 기독교 여성 지도자로, 김활란과는 대조적인 행보를 보였다. 김마리아는 일본 유학 시절부터 2·8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그는 독립선언서를 국내로 밀반입하여 기독교 여성들이 3·1 독립운동에 참석하도록 독려하였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로부터 3·1운동 주동자로 몰려 체포되었고, 고문과 매질로 크게 신체적 손상을 입었지만 평생 고질병을 앓게 되었다. 그러나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애국부인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상해 임시정부에 보내는 등 활발한 움직임을 지속하였다. 중국으로 망명한 후에도 독립운동 세력 간의 의견 대립으로 임시정부가 힘을 잃어가고 있을 때 연합을 강조하면서 독립을 이루는 그날까지 일본에 대항하여 싸워야 함을 역설하였다. 또한 미국 유학 중에도 '근화회'를 조직해서 임시정부와 긴밀히 연대하고 협력하는 등 시종일관 조선의 일차 과제인 독립을 자신의 최우선 목표로 삼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와 같이 김마리아는 일제강점기라는 암울한 역사 현실을 적극적으로 저항하고, 자신의 삶과 일치시킨 공공책임형 지도자 및 체제 저항적 지도자를 선택한 인물이다.
1.4. 김활란과 김마리아의 행보 비교
일제강점기 시대에는 유교 질서의 해체가 본격화되었고, 조선에 대한 일제의 무단강점이 시작되면서 민족적·문화적 자주성이 침해받고, 종교의 자율성 특히 기독교 여성들의 활동에 심각한 장애가 발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