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근세사] 정조와 수원 화성
- 최초 등록일
- 2003.04.17
- 최종 저작일
- 20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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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직접 수원 화성을 답사하고 작성한 레포트 입니다. 많은 도움이 될겁니다.
목차
1.화성의 축성계획과 공사방식
(1)기존축성론과화성의축성계획
(2)화성축성의 공사방식
2. 현륭원의 조성
3. 과천행궁 개축과 용주사 창건
본문내용
1.화성의 축성계획과 공사방식
(1)기존축성론과화성의축성계획
임진왜란에서 전쟁 초기에 조선관군이 왜군에 형편없이 패퇴한 사실과 그로 인해 무고한 백성들이 수도 없이 목숨을 잃은 사실은 조선의 식자들에게 자신의 문제점을 반성할 계기를 주었다. 기존 성곽에 대한 반성도 그중 하나였다. 전통적으로 유사시를 위해 대비해 오던 산성에 대해서 그 방비책이 불충분하다는 반성과 함께 산성의 보강책이 제기되었다. 임진왜란때 재상을 지낸 서애 유성룡은 전쟁이 끝나자 "성곽에는 반드시 옹성과 치성이 갖춰 져야 함'을 거듭 역설했다. 이 말은 훗날 화성을 쌓는데 크게 반영되었다. 그리고 중국과 일본 성제(城制)의 강점을 연구하여 조선의 성을 보다 견고히 할 것을 제안한 학자들도 있었다. 또 실학의 선구자의 한 사람인 반계 유형원은 저서 『반계수록』에서 바람직한 성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성이 주민이 거주하기에 충분한 크기를 갖추고, 성에 포루 등을 설치하여 방어력을 높여 유사시에도 읍성을 떠나지 않고 읍성을 방어하도록 하게 하고, 특히 성내에 사람들이 많이 거주하도록 하고 상공업을 장려해야 한다고 제안하엿다. 이러한 여러 사람들의 제안들과 조정 자체의 필요성 인식 결과, 18세기경에는 몇몇 지방에 방어 시설을 갖춘 읍성들이 생겨났다. 조선 후기의 이러한 일련의 성곽 보완 능력은 나중에 화성을 축조할 때 많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