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시열과 윤휴 - 목차 - Ⅰ. 들어가는 말 Ⅱ. 본론 1. 송시열의 가계 2. 윤휴의 가계 3. 시대배경 4. ... 송시열과 윤휴의 대립 - 사문난적(斯文亂賊) 논쟁 1)송시열의 사문난적 지목 2)사류들의 반응 3)북벌론 (北伐論) -송시열과 윤휴의 차이 4) 예송논쟁 - 서인과 남인의 세력 다툼 ... 그런데 당시 송시열과 윤휴 사이에서는 물론이거니와 그러한 발언에 근거하여 윤휴의 학문 자체에 대한 논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남인들이 윤휴와 허목의 예론을 서인 정권을 타도하고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중요한 도구로 사용하면서 송시열과 윤휴 사이의 오랜 우정도 끝났다. ... 이 때 서인인 송시열과 송준길 두 사람은 기년복(朞年服 : 朞年說)을 주장하고 남인인 윤휴와 허목은 삼년복(三年服 : 三年說)을 주장하였다. ... 이 때 윤휴가 그 논의를 듣고 차장설(次長說)을 근거로 3년복이 옳다는 주장을 조정에 건의하였다.
저자는 당시 윤휴의 관점과 이에 대한 송시열과의 견해 차이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면서, 이같은 인식을 지적한다. ... 책에서 밝히듯 학계의 인식 역시 주자학과 다른 경전 해석을 한 윤휴에 대해 주자학을 신봉하는 송시열이 ‘이단’ 이자 ‘사문난적’으로 몰아서 죽게 했다고 한다. ... 바로 윤휴와 사문난적에 관련한 내용인데, 조선 후기는 성리학이 교조화되면서 나타나는 성리학의 폐단이 흔히 강조되고는 한다.
이후 인조 때에 북벌론 주제에 윤선거는 당색을 넘어서 남인인 윤휴를 포용하자였고 이것은 이이의 조제론과 동일하였지만 송시열은 서인학통 정통 계승자라고 자처하지만 이이의 조제론은 부정하였기에 ... 윤휴를 못 오게 사문남적 논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예송논쟁에서 남인과 서인이 충돌하게 되었으며 숙종 시기에 환국이 반복되는 결과가 나왔다.
남인 윤휴는 3년의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송시열은 오직 긍정적인 평가만 받는다. 부정적인 평가도 송시열의 아쉬운 점을 나열하고 옹호하는 태도일 뿐이다. ... 맺음말 송시열의 사상적 측면에서 살펴보면 송시열이 왜 천하동례(天下同禮)라 일컬은지 상세히 알 수 있었다.
이황 조식 신진사림 효종사망 효종비사망 영남학파 (주리론) 동 인 유성용 허목 윤휴 김효원 이 발 남 인 ( 온 건 ) 남인참여 북벌비판 3년주장 ... 김석주 노 론 (강경) 노론집권 벽 파 노론참여 인현왕후 인현왕후 영조지지 송시열 폐출 복위 민진원 ... 정 예송논쟁 예송논쟁 기호학파 (주기론) 서 인 서인집권 서인집권 서인참여 친명배금 북벌주도 1년주장 9개월주장 이이 성혼 기성사림 김자점 이괄 이귀 송시열
이라면서 회의적이었고, 윤휴를 비롯한 청남계 인사들만이 강력하게 북벌을 추진했다. ... 게다가 이후의 북벌론도 윤휴의 북벌론을 제외하면 자신이 충신이자 유자임을 드러내려는 쇼에 해당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 라면서 혼자서 북치고 장구치고 북벌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효종이었고 효종이 죽은 이후 현종이 즉위한 다음에야 송시열, 송준길 등이 "이전에 효종 대왕께서 강병 수십만을 길러 북벌을
열받은 숙종이 허적 및 윤휴를 죽여버림 서인이 양분됨 (경실환국 때 노론과 소론으로 양분) 노론 : 송시열 중심 – 남인을 다죽여버려 소론 : 윤증 중심 – 남인을 너무 강하게 하지마라 ... 자의대비는 1년간 입음 송시열은 귀양가게됨. ... 인현왕후는 원래 서인이었음 서인이 다시 권력을 잡음, 이때는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격화됨 [문제] 서인이 역모를 고발하여 허적과 윤휴 등이 처형되고 수많은 남인이 관직에서 쫓겨남
효종을 차자로 보아 기년설을 주장 남인: 윤휴는 송시열에게 역모의 마음이 있다고 비판하면서, 효종이 왕이 된 이상 무조건 모든 인간관계는 군신관계로 귀결된다고 함. ... 이에 기해년 복제가 경국대전을 따랐던 것이 아니라 효종을 차자로 본 성시열의 기년설을 좇은 사실이 드러나면서, 송시열 측은 곤경에 빠질 수 밖에 없었음, 남인들은 송시열을 ‘이종비주 ... 서인: 송시열은 보편적인 가족질서 중시, 장자였던 소현세자의 존재 인정.
윤휴를 중심으로 하는 남인은 효종이 왕위계승자라서 사실상 적장자이므로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런데 송시열의 발언은 아주 위험했다. 이는 곧 효종의 정통성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 특히 송시열이 김장생의 문묘 배향을 청원하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문묘 배향의 주도권은 서인 중에서도 노론 중심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주도 붕당과 견제 붕당이 서로 교체됨으로써 정국이 급격히 전환되는 정치 현상 경신환국 (1680) : 2 차 예송으로 남인 집권 → 숙종의 남인 견제 → 서인 집권 ( 허적 ∙ 윤휴 ... 등 남인 축출 ) 기사환국 (1689) : 남인 집권 ( 송시열 등 노론 ( 서인 ) 축출 ) → 인현왕후 유폐 , 희빈 장씨 왕비로 책봉 갑술환국 (1694) : 서인 집권 ( ... 정통성과 관련하여 서인과 남인이 대립한 논쟁 1 차 예송 : 자의 대비 ( 인조의 비 ) 가 효종의 상으로 3 년간 상복을 입을지 ( 허목 둥 남인 주장 ) 1 년간 입을지 ( 송시열
그리고 허적과 윤휴가 사약을 받고 사형당했다. 남인은 삼복의 변이 일어난 지 석 달도 안 되어 주요 인물이 대부분 제거되는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 서인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을 관직 삭탈 후 지방으로 내쫓았고, 주요 관직을 남인으로 교체하였다. 이것이 희빈 장 씨의 등장과 남인의 집권을 이끌어낸 기사환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