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은집회를 주도한 북접, 원평집회를 주도한 남접이 그것인데 그렇다면 이들 북접과 남접의 차이는 무엇이며 더 나아가 북접의 포주라 할 수 있는 최시형과 남접의 포주라 할 수 있는 전봉준과의 ... 전라도에도 북접파가 있고 충청도에도 남접파가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호남지역을 남접, 충청도지역을 북접으로 보는 것은 설득력이 별로 없다. ... 남접과 북접 2. 남접과 북접의 차이점 Ⅲ. 결 론 ※참고 문헌 Ⅰ. 서 론 동학은 1860년(철종 11) 최제우(崔濟愚)에 의해 창도된 조선 후기의 대표적 신흥 종교이다.
충청도 각지에서 동학군의 패배가 거듭되자, 전봉준은 남접과 북접의 주력군을 모아 공주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접은 전봉준과 김개남이 따로 움직였고, 그 외에도 따로 움직이는 세력들이 있었다. 게다가 북접과 효과적이면서도 제대로 된 연합체계를 구성하지도 못했다. ... 손병희의 북접(충청도)은 일본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은 이후 해산한 상태였다. 이외에도 강원도와 황해도에서도 동학군이 발흥하였다.
충청도 각지에서 동학군의 패배가 거듭되자, 전봉준은 남접과 북접의 주력군을 모아 공주 우금치에서 전투를 벌였다. ... 전라도를 중심으로 하는 남접은 전봉준과 김개남이 따로 움직였고, 그 외에도 따로 움직이는 세력들이 있었다. 게다가 북접과 효과적이면서도 제대로 된 연합체계를 구성하지도 못했다. ... 손병희의 북접(충청도)은 일본과 정부군의 습격을 받은 이후 해산한 상태였다. 이외에도 강원도와 황해도에서도 동학군이 발흥하였다.
( 전봉준 ) + 북접 ( 손병희 ) - 한양으로 진격하기 위해 공주 공격 → but, 공주 우금치 전투 패배 (1894. 11.) - 전봉준 등 농민군 지도자 체포 , 처형 갑오 ... 강제 점령 - 청 · 일 전쟁 발발 ☞ 일본의 승리 → 친일 내각 수립과 일본의 내정 간섭 심화 “2 차 갑오개혁 추진 ” 경과 - 농민군 재봉기 ( 삼례 ) - 논산에 집결 → 남접
그러자 무력 봉기에 반대해 오던 교주 최시형의 승인 하에 북접(호서)의 손병희(孫秉熙)가 10만의 농을 전개해 갔다. ... 전봉준은 일본군이 철수하지 않고, 오히려 고종을 인질로 삼아 궁궐을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에 1894년 10월, ‘척왜양(斥倭洋)’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남접(호남) 농민군을 지휘하여
보기 - 몰락 양반 유계춘 주도 :진주농민봉기 - 청군이 파병되는 결과, 남접, 북접 연합 전개- 동학농민운동 17. ... 부탁하며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세금 징수 않겠다는 문서 전달 우병사 백낙신이 시위를 해산하려 하자 농민들이 그를 포위하여 감금 - 진주 농민 봉기 - 박규수가 안핵사 파견 보기 - 남접북적
개편 : 탁지아문 ③ 과거제 폐지 / 공사 노비법 혁파 (신분제 폐지) ④ 과부의 재가 허용 / 조혼 금지 ⑤ 연좌제 금지 / 은 본위제 채택 2차 동학농민운동 : 삼례 집결 → 남접 ... 북접 연합 전개 → 우금치에서 일본 군 및 관군에 맞서 싸움 → 실패 2차 갑오개혁 (김홍집, 박영효) ① 홍범 14조 반포 ② 전국 8도를 23부로 개편 ③ 재판소를 설치하여 사법권
호남군은 전봉준이 지휘, 북접의 호서군은 손병희의 지휘 - 교주 최시형의 승인하에 일본군을 공격하면서 결의 국무원(행정부) 내부, 외무, 군부, 법무, 재무, 학무, 교통, 노동부 ... 유발, 친일정부 수립 후 조선 내정간섭 봉기 : - 척왜를 구호로 내걸고 다시 봉기, 일본과의 항쟁이라는 반외세가 거병의 주요 목표 *우금치전투(1894.11, 2차 봉기) - 남접의
>전주성 점령-> 정부의 청 파병요청-> 일본군도 파병 ->전주 화약(집강소 설치)->정부 교정청설치 •2차 봉기(1894.9): 일본군의 경복궁 무력 점령, 청일전쟁 -전봉준의 남접 ... , 손병희 중심의 북접이 연합부대 결성 -> 공주 우금치전투 패배 ⊙갑오개혁 ⊙갑오개혁 •1차 갑오개혁(1894.7): 1차 김홍집내각, 군국기무처 설치 -개국기원 사용, 6조→8아문
특히 남접파 북접파의 이념 대립과 이익배분(토지싸움)으로 인한 내부분열은 민중의 지원을 잃어버린 대표적 사례였다. ... 동학 혁명은 남접 북접파의 분열(주도권 재탈로 인한 내부분열), 혁명 이후에는 없었던 새로운 비전, 조직구성열악, 무기체계빈약, 분열로 인한 지원세력미비, 조선정부가 왕권 도전으로
이러한 전국 각지에서의 대부민싸움은 북접파와 남접파의 대립이 격화되는 방향으로 전개되어 9월 기포(강원도 봉기)에서는 남접의 총과 칼에 북접파의 사람들이 희생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된다 ... 이러한 남접파의 대부민싸움 일면에서는 북접파의 기반을 붕괴시키는 것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리하여 북접파는 비상한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 이점은 북접파가 ‘부농’층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인데, 남접파는 바로 이러한 ‘부농’= 부호를 대상으로 싸움을 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