岩把燕王所言, 具述一遍, 孝孺?然。 암파연왕소언 구술일편 효유묵연 설암은 연왕의 말을 한번 두루 구술하니 방효유가 침묵했다. 及岩入見帝, 亦備述前意, 且言燕軍甚盛, 不易破滅。 ... 岩沿途不敢逗留, 數日到京。 암연도불감두류 수일도경 설암은 길을 따라 감히 머뭇거리지 못하고 며칠만에 수도에 이르렀다. 方孝孺先與岩晤, 詳問燕事。 ... 岩唯唯聽命。 암유유청명 설암도 예예하면서 명령을 들었다. 燕王復令中使送他出境。 연왕부령중사송타출경 연왕은 다시 중사를 시켜 그를 경계에 나가게 전송했다.
離支爲後軍, 末將燕不下爲引戰, 耶律德勝爲招討主將, 興兵二萬前往雁門關。 ... 珠龍, 二騎交鋒, 有似岩前爭食虎。 *裡의 원문은 里이다 2장수는 물속에서 구슬을 빼앗기 다투는 용처럼 2기마가 교전해 마치 바위앞에 먹을 것을 다투는 호랑이 같았다. ? ... , 乃是燕國景耀龍來奏稱:「秦斌乃是敗國之臣, 未可賜與先鋒。奴婢乞與秦斌比試。」 초나라 왕이 눈을 들어 한번 보니 연나라 경요룡이 상주했다.
강원도 사람들은 암하노불(岩下老佛), 곧 바위 아래 있는 늙은 부처와 같은 품성을 지녔다. ... 뜻으로, 청백리(淸白吏)를 비유하여 이르는 말. - 삼마태수(三馬太守) 이야기 송흠은 성종 때인 1492년 식년과(式年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에서 근무하다가 연산군(燕山君, ... 하지만 연산군(燕山君, 재위 1494∼1506)의 폭정(暴政)을 비판하여 관직에서 물러났으며 후진 교육에 전념했다. - 삼마태수(三馬太守)의 의미 세 마리의 말을 타고 오는 수령이라는
結論 : 燕岩의 선비觀 이제까지의 논의를 토대로 燕岩이 생각하였던 참다운 선비의 특징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 결국 燕岩의 관심은 처음도 선비요 나중도 선비였다. ... 단지 그는 北伐論 주변의 事實을 도구로 삼아 燕岩 당대까지도 社會的 沮害要素로 남아 있던 精神的 病理를 비판하력 했던 것이다. (3) 北學과 利用厚生學 燕岩이 말하고 있는 학문의 내용은
전형적인 객사의 형태를 띄고 있는데, 정청에는 취암지관(岩之館)이라는 현판이 달려 있는데 주변에 있는 수리산을 뜻하는 말이다. ... 백성들은 과거의 연산군(燕山君)의 폭정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백성들에게 정조는 안정과 평화를 선물해야 했다. 그리고 그 방책의 하나가 바로 능행길이었다.
本稿에서는 “선비란 무엇인가”에 대한 燕岩의 탐구과정을 살펴봄으로써 교육받은 사람 혹은 敎育的 人間像에 대한 燕岩의 관점을 밝혀보려고 한다. ... 燕岩이 생각하였던 참다운 선비의 특징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 결국 燕岩의 관점에서 보면 변해야 할 것은 民衆이 아니라 선비들이다.
박지원의 자(字)는 중미(仲美)요, 호(號)는 연암(岩燕)이고 또 별호를 미재(美齎), 총계(叢桂), 계산(桂山)으로도 썼다. ... 작 가 소 개 연암(岩燕) 박지원(朴趾源 1737~1805) 이조 정조 때 실학파이자 이용후생을 강조한 북학파의 거두. 1737년(영조 13년) 2월 5일 한양에서 박씨(朴氏) 사유
, 완포옌[万佛岩], 쉬안우펑[玄武峰], 디추이구[滴翠谷] 등 8개의 풍치지구로 구성되어 있다. 산옌[三眼]동굴을 비롯한 종유동이 다수 분포한다. ... -춘추 전국시대- 춘추시대 동안 허베이 지역은 북쪽은 연(燕)의 판도에 속했고, 남쪽은 진(晉)이 지배했다. ... 이 땅을 연운16주(燕雲十六州)라고 하는데, 이 지역이 만리장성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이후의 한족 왕조들은 방어에 어려움을 겪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