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리아전기 감상문
- 최초 등록일
- 2009.03.25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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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간고사 대체 레포트로 작성하여 A+을 받은 감상문입니다.
목차
Ⅰ. 로마의 장군, 카이사르
Ⅱ. 카이사르의 갈리아전기
제1권 (BC. 58년)
제2권 (BC. 57년)
제3권 (BC. 57 - 56년)
제4권 (BC. 55년)
제5권 (BC. 54년)
제6권 (BC. 53년)
제7권 (BC. 52년)
제8권 (BC. 51년)
본문내용
카이사르는 로마 출생으로 시저라고도 한다. 서양사상 가장 큰 영향을 남긴 사람의 하나이다. 유서 깊은 귀족 집안 출신이었으나, 그 조상에는 유명한 정치가는 없다. BC 69년 재무관, BC 65년 안찰관, BC 63년 법무관 등 여러 관직을 역임하면서 인심 파악의 수완이 능하여 민중과 친근한 입장에 서서 로마와 기타 속주에서 군무에, 그리고 실제의 정책 운영면에서 착실하게 성과를 거두어 명성을 획득하고 대정치가로서의 기반을 구축하였다. BC 60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함께 제1회 3두동맹(제2회 3두동맹이 공식적인 것에 반해 이것은 사적인 것)을 맺고, 이것을 배경으로 하여 BC 59년에는 공화정부 로마의 최고 관직인 콘술에 취임하였다. 콘술로서 국유지 분배법안을 비롯한 각종 법안을 제출하여 크게 민중의 인기를 얻었다. BC 58년부터는 속주 갈리아의 지방장관이 되어 BC 50년까지 재임 중 이른바 갈리아전쟁을 수행하였다. 그 동안 갈리아의 평정만이 아니라 라인강을 건너 게르만족의 땅으로 침공하기를두 차례, 영국해협을 건너 브리튼섬으로 침공하기를 두 차례나 하였다. BC 52년 베르킨게토릭스의 주도 아래 갈리아인의 대반란이 일어났으나, 이것도 진압하여 일단 갈리아전쟁은 종지부를 찍고 평온을 되찾았다. 오랜 갈리아전쟁은 그의 경제적 실력과 정치적 영향력을 증대시켰다. BC 53년 크라수스가 메소포타미아에서 쓰러지자 제1회 3두정치는 붕괴되고 원로원 보수파의 지지를 받은 폼페이우스와도 관계가 악화되어 마침내 충돌하기에 이르렀다.
군대를 해산하고 로마로 돌아오라는 원로원의 결의가 나오자 BC 49년 1월, 그 유명한 ꡒ주사위는 던져졌다ꡓ라는 말과 함께 갈리아와 이탈리아의 국경인 루비콘강을 건너 로마를 향하여 진격을 개시하였다. 우선 폼페이우스의 거점인 에스파냐를 제압한 다음 동쪽으로 도망친 폼페이우스를 추격하여 BC 48년 8월 그리스의 파르살로스에서 이를 격파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