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보의 발달과정
- 최초 등록일
- 2009.03.05
- 최종 저작일
- 20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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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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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조보(朝報)의 발행
2.조보의 배포방식
3.조보의 내용
4.조보의 의의와 영향
본문내용
1.조보(朝報)의 발행
우리나라에서는 근대 신문이 발행되기에 앞서 뉴스를 전달하는 서한신문의 형태로 존재하던 것이 조보였다. 조보는 기별 또는 저보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이러한 전근대적인 형태의 뉴스 전달 매체가 언제부터 존재했는지 그 확실한 기원을 알 수는 없지만 조선조 초기 또는 그 이전부터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언론사, 나남출판, 25p
조보는 기별 또는 저보 등의 여러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승정원의 발표사항을 기별서리들이 손으로 써서 주로 관리를 중심으로 양반계급에게 배포하던 전근대적인 형태의 뉴스전달매체였다. 이상희, 조선시대 커뮤니케이션 현상연구, 나남출판, 1993
조보의 발행처는 승정원이었다. 아직 신문사와 같은 언론기관에서가 아니라 봉건정부에서 직접 그 발간사업을 담당, 수행한 셈이다. 승정원에서 봉건관리들에게 그때 그때 알릴 필요가 있는 자료들을 관공문서들 가운데서 선택 발취하여 매일 붓으로 써서 조보서에 게시하면 중앙 각 관서와 한성부 및 저(서울에 있는 지방장관들의 연락소와 같은 것)에서 기별서리들이 모여와 그대로 종이에 옮겨 베껴서 해당하는 관리들이 전달하였다. <리용찬, ‘조선신문100년사‘,29p>
조보의 기원은 대해서는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으나 문헌에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에 들어서이다. 세종 때의 기록에 저보나 `기별` 등의 용어가 처음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조선 초기에는 `기별지`라고 해서 예문춘추관의 사관이 조정의 결정사항과 견문록 등을 기록하여 각 관청에 돌렸다고 한다. 조보라는 명칭이 최초로 나타나는 것은 〈중종실록〉(중종 3년 4월 신해조)에서이다. 따라서 적어도 중종 이전에 조보의 발행이 제도화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보 외에도 여러 가지 명칭이 있는데, 조지·기별지·저보·저지·난보·경보·한경보·저상 등이 사용되었다. 이렇듯 여러 명칭이 혼용되었던 이유는 조보에 제호식의 명칭이 기재되지 않았던 점과 독자층이 중국문화에 밝은 관계로 중국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여러 명칭 중 조보·기별·저보가 가장 많이 쓰인 명칭이고, 나머지는 여기에서 파생되었거나 중국에서 통용되던 것을 그대로 쓴 것들이다.
조보는 조선정부의 관보 성격을 띠는 것인데 조보 발행을 위해 독립된 기관을 설치했던 것은 아니며 왕명을 출납하는 승정원이 발행의 중심 기관이었다. 승정원이 직무상 수집한 자료에 의존하여 조보소에서 조보를 제작했다. 제작은 필사에 의존했다. 필사의 임무는 조보소의 기별서리들이 맡았다.
참고 자료
<‘한국언론사’, 나남출판,2001>
<김세철,김영재, ‘조선시대의 언론 문화’, 커뮤니케이션북스>
<이상희, ‘조선시대 커뮤니케이션 현상연구’, 나남출판, 1993>
<네이버 백과사전, http://100.naver.com/100.nhn?docid=138451>
<다음 백과사전, http://enc.daum.net/dic100/topView.do>
<엠파스 백과사전, http://100.empas.com/>
<박정규, “조선왕조시대의 전근대적 신문에 관한 연구-조보와 그 유사물의 특성을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박사학위논문,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