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에 대한 잘못된 상식 모음1
- 최초 등록일
- 2009.03.02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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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우리 역사에 대한 잘못된 상식 모음
목차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풍습이다?
행주치마는 행주대첩에서 나온말이다?
두문불출은 ‘두문동 72현’에서 나온 말이다?
함흥차사는 모두 죽었다?
현모양처’는 조선시대의 이상적 여성상이다?
본문내용
“고려장은 고려시대의 장례풍습이다?”
고려장은 고려, 고구려와 상관이 없다. 설화가 사실로 혼동되어 굳어진 것이다. 고려장 설화엔 원곡이야기 유형과 기로국이야기 유형이 있는데, 여기서 기로국이 고려국으로 기로장이 고려장으로 변해 굳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 고려장이 고려 때 있었다고 일반인들이 두루 믿게된 시대는 일제시대로 동화가 여기의 견인차 노릇을 했다. ‘조선동화집’을 비롯한 동화집의 편찬동기와 의도는 일제 식민 통치와 결부시켜볼 수 있겠다. 고려시대에는 주로 화장을 했고, 왕들은 매장을 주로 했다고 전해진다.
“행주치마는 행주대첩에서 나온말이다?”
행주치마와 행주대첩이라는 용어는 각각 따로 존재했다. 그 이유는 행주산성 전투가 일어난 1593년 이전에, 역관이자 국어학자였던 최세진이 쓴 ‘사성통해’에 행주치마란 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또한 행주라는 지명은 행주대첩이 일어나기 600여년전인 고려 초에 이미 존재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이런 오해가 생긴 것은 민간어원설에 근거하여 연구하는 중에 행주산성과 행주치마의 ‘행주’가 음이 같기 때문에 어원도 같을거라고 잘못 유추했기 때문이다. 행주치마의 행주는 抹布, 즉 닦는 헝겊이라는 뜻으로 행주치마는 여인네들이 치마를 더럽히지 않기 위해 덧입고서 젖은 손을 닦거나 그릇의 물기를 훔치는데 쓰이던 것이다.
또한 알려진 바와 다르게 행주대첩은 순전히 행주치마의 활약으로 이겼다기보다는 유리한 지형조건, 우수한 화약무기, 일치단결한 병사들과 백성들 이 삼박자가 고루 갖춰져 빚어낸 결과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