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김구를 읽고
- 최초 등록일
- 2009.01.10
- 최종 저작일
- 2008.03
- 8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백범김구를 읽고 적은 감상문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어느 위인전을 읽어도 책의 첫 자락에 언제나 소개되어지는 범상치 않은 출생에 얽힌 일화라고 치부해 버리기엔 그의 훗날 업적이 너무 위대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정말 담담하게 들려주는 지난날의 이야기 같은 문체가 거부감이 없게 느껴졌다. 어린 시절의 백범과 관련해서 그의 어머니인 현풍곽씨를 먼저 예기해야 할 것 같다. 그의 어머니는 현풍 곽씨(이름, 낙원)로 l4의 나이에 열살 위인 신랑을 맞아. 17세 때 난산 끝에 백범을 낳았다. 부모는 백범의 교육을 위해 자기 집에다 서당 선생을 모시기도 하고, 부친의 병환으로 학자금이 부족할 때에는 이웃마을의 서당 훈장에게 간청. 무료로 교육시키기도 하였다. 특히 모친은 백범의 일생에 큰 영향을 미친 분이다. 백범이 옥에 갇혔을 때 옥바라지를 맡아 위로와 용기를 주었을 뿐 아니라 `안악사건`으로 투옥되었을 때에는 "경기감사를 하는 것보다 더 자랑스럽다"고 말함으로써 백범에게 큰 격려를 주었다.
일찍 죽은 며느리를 대신하여 손자 인(仁)과 신(信)을 양육한 자정이며, 백범이 독립운동을 하는 데에 지장이 되지 않도록 두 손자를 이끌고 귀국하여 어려움을 극복하는 인내며, 왜경을 따돌려버린 여성답지 않은 특유의 대담성과 뛰어난 지모며, 백범이 일지를 쓸 때 그 자세한 연월과 일시를 일일이 자문할 정도로 만년에까지 간직한 총기 등은 임정 주석 백범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고 생각된다. 그러한 훌륭한 어머니 아래에서 백범이 나올 수 있었고 또 백범이 흔들리거나 혹은 힘든 일과 정신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때마다 그처럼 강직하고 지혜로운 어머니가 있었기에 백범이 그 의지를 더욱더 곧추세우게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또한 든다.
어릴 적의 백범은 가정이 빈한하여 고명한 선생을 찾아가 배울 형편이 되지 못해 그 아버지는 고민이 많았다. 헌데 백범이 살던 동네에서 10리쯤 떨어진 학명동이란 곳에 사는 정문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비록 상민이었지만 지방 굴지의 선비였고 그의 큰어머니와 재종 남매 간이었다. 그 정씨 집에는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시와 부를 기었으며, 다른 한쪽에서는 서당을 열어 아동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백범의 아버지가 정씨에게 부탁을 해서 백범은 수강료 없이 배우는 ‘면비학동’이 될 수 있었다. 그는 너무나 만족하여 매일 밥구럭을 메고 험한 고개 깊은 계곡을 쏜살같이 넘나들어 그곳에 기숙하는 학생들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때 도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렇게 힘들게 공부를 했었던 백범은 1892년 과거에 낙방하는 것을 계기로 인생의 활로를 새롭게 모색한다. 그는 한때 풍수지리와 관상을 공부하였으나 만족하지 못했다. 19세기말의 민족적 수난을 감지하면서 동학에 입문한 백범은 최시형으로부터 황해도 팔봉접주로 임명받아 해주성 공격에 앞장섰으나 청군의 철수로 실패하였고, 황해도 동학군의 자중지란으로 세력을 잃게 되자 안중근의 부친 태훈의 호의를 받아들여 부모를 모시고 청계동으로 들어가 잠시 우거하였다. 그는 거기서 일생동안 자신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 척사위정(斥邪衛正)계의 유학자 고능선을 만나 그의 섬세한 가르침을 받았다. 그는 고능선의 가르침을 통해 지금자신이 무엇을 해야만 하는지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디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나마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후 백범은 청계동을 찾아온 김형진을 만나 의기투합, 조국 순례에 나선다. 그들은 평안도와 함경도 지역을 돌아서 간도 땅에 이르러 국경지역 주변에 거주하는 동족들의 어려움을 목도한다. 강계 부근에서는 김이언 부대를 따라 `국모` 의 원수를 갚는 의병운동에 참여했으나 실패하였다. 백범은 다시 `방랑의 길`에 올랐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