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산탈춤 연구
- 최초 등록일
- 2008.12.22
- 최종 저작일
- 2008.11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봉산탈춤에 대해 분석한 레포트자료 입니다.
목차
1. 봉산탈춤의 전승과정
2. 봉산탈춤의 특징
3. 봉산탈춤 내용 및 해설
본문내용
1. 봉산탈춤의 전승과정
봉산탈춤은 황해도 지방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해서(海西) 탈춤 중에서 대표적인 탈춤으로 전승되어 왔다. 위 지역은 『택리지(擇里志)』에 소위 남북직로(南北直路)의 주요 읍 및 장터로써 포함되어 있다. 즉 농산물과 수공업 생산물의 교역지이며 소도시였다. 이러한 지역적 성격은 탈춤 공연의 경제적 여건을 마련하였다. 5일장이 섰던 거의 모든 장터에서는 탈꾼들을 초빙하여 적어도 1년에 한 번씩은 놀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 탈춤이 황해도의 대표적 탈춤이 된 것은 18세기경이라고 하며, 당시의 주동적인 중흥자로서는 안초목(安草木)의 이름이 전해지는데, 그는 전라남도의 어느 섬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온 후 기존에 쓰이던 나무탈을 종이탈로 바꾸는 등, 이 놀이를 많이 개혁하였으며, 그 후 안초목과 같은 이속(吏屬)들이 단체를 만들어 상인들의 후원 아래 전승되어 온 것으로 전해진다.
봉산탈춤은 세시풍속의 하나로써 4월 초파일에 놀았다고 한다. 양주 별산대 놀이도 4월 초파일에 등불놀이와 함께 성대히 놀았다고 하는데, 이것은 고려 이래의 연등(燃燈)행사의 전통을 이은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조선조 말에는 5월 단오날 밤에도 모닥불을 피워 놓고 새벽까지 연희되었다. 지금도 북쪽 지방에서의 단오는 남쪽 지방의 추석과 맞먹는 명절로써 성대하게 지내고 있다.
산대놀이가 비교적 전업화된 놀이로써 관의 행사와 보다 많이 관련된 것에 비하면 봉산 탈춤 등 황해도 탈춤은 주로 농민과 장터의 상인들을 상대로 한 놀이였지만 역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 날과 같은 관아의 경사와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도 특별히 연희되었다. 다른 군과의 연희 경연에는 5월 6ㆍ7ㆍ8일에 놀았고, 우승하면 감사로부터 후한 상을 받았다고 한다.
봉산탈춤은 봉산 구읍 경수대(지금의 봉산군 동선면 길양리)에서 연희되었으나 1915년경에 군청 등 행정기관이 사리원으로 옮겨 가고난 후에 경의선 철도가 개통되자 이 놀이도 사리원으로 옮겨져 경암산 아래에서 행해졌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보아 봉산 탈춤은 끊임없이 지역적, 역사적 영향을 받으면서 개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