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와 국토
- 최초 등록일
- 2008.12.07
- 최종 저작일
-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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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교양 과목 수업중 작성한 리포트로 A 맞은 자료입니다.
목차
1. 동기
2. 역사
3. 자연환경
4. 인구변화
5. 산업구조변화
6. 지명유래
7. 동단위 행정구역도
본문내용
2. 역사
나주는 선사시대부터 영산강유역에 인류가 거주하며 독특한 형태의 문화를 생성시켜 왔다. 삼한시대에는 마한의 불미지국(不彌之國)이었으며,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으로 발라(發羅)ㆍ통의(通義)라 불리여 졌다. 통일신라에 이르러 금산(錦山)ㆍ금성(錦城)으로 개칭되었으며 후백제시대에 와서 비로소 나주(羅州)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또 나주는 고려시대 때 왕건이 고려를 개국함에 있어 그 발판으로 삼았던 만큼 고려시대에 이르러 급격히 부상하기에 이른다. 나주는 왕건과 견훤이 후삼국의 패권을 잡고자 공방전을 벌였을 때 왕건이 승리한 것을 계기로 역사의 중앙무대에 등장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왕건은 나주오씨와 인연을 맺었고 또한 아들을 낳았다. 이가 장황왕후와 고려 제 2대왕 혜종이다. 고려시대인 983년 전국12목의 하나로서 나주목이 되어 5개군과 11개현을 다스렸으며, 고려 현종 때 현 전남지방에 유일하게 나주만이 목이 되어 이 지방의 중심지가 되었다. 특히 거란의 2차 침입 때는 현종이 나주로 몽진와 10여일 머무르며 지금의 심향사에서 연등회와 팔관회를 개최케 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나주에 진을 두었다가 후에 전라 우영이 설치되었다. 그 후 1896년 나주관찰부가 폐지될 때까지 약 천년간 306명의 목사가 부임하여 호남을 다스렸던 호남의 웅도였다. 그러나 정여립의 반란사건으로 비화된 기축옥사의 영향을 가장 크게 받았으며, 영조조의 이인좌난이나 서원조직을 둘러싼 남인과 노론세력간의 끈질긴 경쟁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후기에 들어와 상인․향리세력의 성장이 가장 활발하였고, 구한말 보수와 개혁의 다양한 양상이 펼쳐지기도 하였다. 갑오농민전쟁동안 나주는 끝내 동학군들에 대항하여 읍성을 지켰으며 단발령사건 ․ 한말 호남 의병 항쟁 ․ 궁삼면 토지회수 투쟁과 광주학생독립운동 ․ 나주 농업 보습학교 생들의 만세시위사건 등 역사적 사건의 주무대이기도 하였다. 특히 나주의 금성산과 서울의 삼각산, 한간과 영산강, 남산등 그 지세가 꼭 서울을 닮았다 하여 예부터 ‘小京’ 즉, 작은 서울이라 불러왔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