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고운 최치원 선생의 문학관
목차
1. 머리말
2. 남북국시대 육두품 지식인 최치원의 삶
3. 최치원의 사상
4. 최치원의 한시
5. 최치원의 산문
1)『사산비명』,『향악잡영』과 민족주체의식
2) 변려체의 가치
6. 문학사적 의의
본문내용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후 한반도에서 자기 문화를 발전시켜 나갔다면 발해는 대륙에서 개성 있는 문화를 꾸려나갔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은 이러한 남북국시대(南北國時代)의 신라의 육두품(六頭品)으로 개인의 삶 속에 국가와 민족의 문제를 감싸 안고 있는 문제적 개인이었다.
본고에서는 문제적 개인이라 할 수 있는 최치원의 문학적 성취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그에 앞서 남북국 시대의 상황과 계급적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었던 육두품 지식인으로서의 그의 삶을 살펴보겠다. 그러한 배경을 통해 그가 가졌던 의식과 사상을 살펴보려고 한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알아보고, 그가 가졌던 사상이 어떻게 문학에 녹아들었는지를 한시와 산문을 중심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마지막으로 그의 문학사적 의의에 대해 논하는 것으로 글을 마치고자 한다.
본고는『고전문학작가론』에 실려 있는 이강옥의「남북국시대 최치원의 문학과 역사적 성격」을 토대로 하여 여러 문헌들을 참고했음을 미리 알려두는 바이며, 문헌의 세부적인 내용과 출처는 본문과 주석을 통해 밝히도록 하겠다.
2. 남북국시대 육두품 지식인 최치원의 삶
최치원(崔致遠 857~?)은 경주 사량부(沙梁部) 출신으로 자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다. 최치원이 살던 당시는 신라가 삼국을 통일한 후 한반도에서, 그리고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들이 세운 발해가 대륙에서 각각의 문화를 꽃피우고 있었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면서 그 문화적 역량을 더욱 키워 8세기에서 9세기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하였으나 골품제라는 신분제도의 모순 심화, 토지 소유의 집중, 그리고 왕위를 둘러싼 귀족간의 갈등 격화 등 체제를 위협하는 문제들에 봉착하게 된다. 귀족들과 사원의 대토지 소유는 농민들을 유랑민으로 만들었고, 889년 사벌주의 농민 봉기와 같은 농민들의 반란을 초래했다. 또한 신라 말 골품제는 특히 육두품의 현실적 입지를 옥죄었으니, 급격하게 늘어난 진골 계급이 육두품에게 보장된 벼슬자리들을 박탈해 가는 경우가 그 두드러진 사례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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