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8.11.04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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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김녕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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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시조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3> 집성촌
본문내용
1> 시조 : 김시흥[金時興]
2> 본관 및 시조의 유래
김녕(金寧)은 경남 김해의 옛지명으로 일찍부터 가락국의 문화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다가
서기 532년 신라에 병합돠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그후 경덕왕이 김해소경으로 고쳤고,
고려초기 인 940년 김해부로 고쳐 임해,․금주, 등으로 불리웠으며, 조선때 와서는 태종이
다시 도호부로 고쳤다가 1895년(고종 32)에 군(郡)이 되었다.
김녕김씨(金寧金氏)의 시조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의 넷째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으로
의성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때 묘청의 난을 평정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고려말에 지명이
김해로 개칭되자 김해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계통의 김해 김씨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金海金氏)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후김(後金)으로 칭하다가 1865년(고종) 왕명에 의하여 김녕(金寧)으로
확정 하였다.
김녕 김씨는 시조 시흥(始興)의 증손 중원(重源)이 고려조에서 형부시랑을 지내고
이부 상서에 증직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하였다.
공양왕 때 판도판서를 지낸 광저(光儲)는 무록산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 로
절의를 지켰는데, 태종이 이조 판서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