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과 그에 따른 중국의 개항
- 최초 등록일
- 2008.10.03
- 최종 저작일
- 20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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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아편 전쟁 이후 벌어진 일련의 개항과 서양열강의 제국주의 면모를 소개한 글입니다.
목차
Ⅰ. 서론
▷ 광동무역체제
▷ 청조사회의 변화
▷ 당시 아시아의 정세
Ⅱ. 본론
▷ 중국과 영국 간의 무역관계
▷ 제1차 중영 전쟁(아편전쟁 1840~1842)
▷ 난징조약과 중국사회의 개방
▷제 2 차 중영 전쟁 - 애로우호 사건과 베이징(北京) 조약
Ⅲ. 결론
▷ 왜 아편전쟁을 중영전쟁으로 불러야 하는가?
▷ 제12차 중영 전쟁에서의 패배, 그 이후
≪주요 단어 정리≫
본문내용
Ⅰ. 서론
중국의 근대사는 아편전쟁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외에도 아편전쟁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중국의 근대가 시작되는 기점이기도 하지만 그동안 중국인들의 뇌리 속에 간직해오던 ‘우리가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사상이 `외국 오랑캐‘에 의해 패배를 맛보았고 중국이 그동안의 우월적인 조공관계의 수혜자에서 벗어나 서양의 열강과 근대적인 조약을 체결함으로써 이후 수많은 수모를 겪게 되는 비운을 맞이한다.
또한, 중국이 패권을 쥐고 있던 동아시아세계의 충격으로써 지금까지 내려오던 동아시아의 국제질서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아편전쟁의 원인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 두 가지를 짚고 넘어가겠다.
▷ 광동무역체제
중국은 수당제국 성립 이래 동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며 중국을 중심으로 한 질서체제와 함께 중국의 자존의식을 유지해왔다. 이를 바탕으로 정치적으로는 책봉을 통한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와 경제적으로는 조공과 회사(回賜)를 통한 조공무역체제를 통해 ‘동아시아의 천제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동무역체제란 이러한 중국중심의 천하관이라는 전통적인 틀에서 크게 변하지 않은 정책이었다. 17세기말 이래 중국은 서양상인의 빈번한 내항으로 자연스럽게 몇 개의 항구를 열었는데, 1757년 건륭제는 광동 항구에만 한정해 교역을 허락하고, 그 주도권을 공행(公行)이라고 불리는 허가받은 중국상인의 관리하에 두었다. 이 무역체제는 서양 세력의 통상 요구와 조공무역체제의 중간 타협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다. 광동에는 월해관(粤海關)을 설치하여 서양각국과의 무역을 청조관료와 공행(公行)으로 철저하게 한정하였다. 또한 서양상인의 체류기간도 10월부터 1월까지로 한정하며 수출품을 중국 측에서 제한하거나 무역을 중지시킬 수도 있었다. 서양의 입장에서는 동등한 나라 간의 무역이 아니라 지대물박(地大物博)의 나라의 일방적인 시혜를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참고 자료
신채식 / 동양사개론 / 삼영사 / 1993
신성곤윤혜영 / 한국인을 위한 중국사 / 서해문집 / 2004
강길중 박종현 정재훈 / 중국 역사의 이해 / 경상대학교출판부 / 2003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