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왕, 광해군
- 최초 등록일
- 2008.09.15
- 최종 저작일
- 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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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광해군의 출생부터 비참한 최후까지, 광해군의 정치나 외교정책을 포함한 광해군의 일대를 정리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ⅰ. 광해군시대 주요 사건과 연표
ⅱ. 광해군의 발자취
(1) 광해군의 출생과 성장과정
(2) 전란이 가져다준 왕위
ⅲ. 실리주의자 광해군
(1) 광해군의 정치
(2) 광해군의 탁월한 외교정책
ⅳ. 비운의 왕, 광해군
(1) 반정, 그리고 폐위
(2) 광해군의 최후
본문내용
(1). 광해군의 출생과 성장과정
1575년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이름은 혼(琿)이다. 어머니는 김희철의 딸이었는데 김희철은 사포서를 관리했다.
사포서는 왕실의 채소와 과수 등의 재배를 맡는 관청이었다.
유년기에 광해군이 맞이한 가장 큰 사건은 어머니의 죽음이다. 광해군이 3살 되던 해 산후의 후유증으로 일찍 사망 하였는데 이 사건은 광해군의 성격에 큰 영향을 끼쳤다.
광해군은 어머니의 그리움을 항상 느끼면서 자랐다. 광해군의 일기를 보면 광해군의 내성적인 성격이 잘 나타나있는데 그 이유는 아마도 어머니의 빈자리를 항상 느끼면서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친형인 임해군을 제외하면 이복 동생이 밑으로 12명이 있었다.
정비에서 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선조의 총애를 받기 위해서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광해군은 어렸을 때 총명하고 학문하기를 좋아했다고 알려진다.
특히 역사 분야에 관심이 많아서 나중에 왕위에 오른 뒤에 강연을 할 때에도 대신들 앞에서 자신의 박학함을 과시했다고 한다.
광해군은 유자신의 둘째 딸과 혼인을 했다. 유자신 본인은 높은 벼슬에 있지 않았지만 유자신의 부친은 공조판서와 한성판윤을 지냈다. 외가 역시 조선 초의 대학자 정인지의 후손으로 명문반열에 들었다. 부인 윤씨는 자기 주관이 뚜렷하고 당찬 여인이었다. 1619년이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할 때 명편을 들것을 권유하는 글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인조반정이 일어났을 때에는 ‘오늘의 거사가 대의를 위한 것이요 아니면 일신의 영달을 위한 것이요’ 하면서 힐난하기도 하였다.
(2). 전란이 가져다준 왕위
위에서 볼 수 있듯이 광해군은 선조의 둘째 아들이었다.
선조는 정비 의인왕후 박씨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다.
대신 후궁들과의 사이에 13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왕자가 임해군과 광해군이다.
참고 자료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들녘, 1997
한명기, ‘광해군 : 탁월한 외교정책을 펼친 군주’, 역사비평사, 2000
신봉승, ‘성공한 왕, 실패한 왕’, 동방미디어, 2002
광해군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