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암 조광조
- 최초 등록일
- 2008.07.13
- 최종 저작일
- 20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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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광조에 간단한 생애, 도통을 중심으로 한 그의 업적과 학행에 대해서 작성한 레포트
목차
1. 영남학파로 이어온 道統중 유일한 기호학파인 이유는?
2. 治의 조광조가 다른 사람과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3. 개인의 선비적 학행은 어떠했을까?
본문내용
1. 영남학파로 이어온 道統중 유일한 기호학파인 이유는?
조광조는 1506년 중종반정으로 조선 왕조가 개혁을 요구하던 시대적 당위에 직면하여 그 역할을 온몸으로 감당하다가 39세의 젊음을 사약으로 마감한 혁명적 지식인이다. 그는 17세에 어전찰방으로 부임하는 아버지 조원강을 따라감으로써 희천에서 귀양 살던 김굉필에게 수학할 기회를 얻었다. 김굉필은 정몽주-길재-김종직을 계승하는 영남사림의 핵심 인물로서 무오사화로 유배 중이었다. 이 만남은 조광조의 인생을 바꾸어 놓을 만큼 운명적인 것이었다. 무오사화 직후 그 사화로 화를 입은 김종직의 문하에 들어간 것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사화의 뿌리인 성리학적 이념을 공부하겠다는 결심도 범상한 일은 아니었다.
조선 성리학의 道統
道統은 송나라 때의 유학자 주희가 주창한 영구불변한 道의 전승자의 계보로 상고의 신성-요-순-우-탕-문왕과 무왕-공자-안연, 그리고 증자-자사-맹자-이정자(정호, 정이형제) 등 계보를 설명, 성리학이 유학의 정통임을 주장하였다. 이러한 중국의 성리학은 조선으로 넘어와 정몽주-길재-김숙자-김종직-정여창-김굉필-조광조-이언적-이이로 학통이 이어졌다.
고봉 기대승이 정리한 조선 성리학의 학통
“우리나라의 학문은 …… 여말의 우탁, 정몽주 이후에야 비로소 성리학이 있음을 알았고, 조선 세종 조에 이르러 예악(禮樂) 문물(文物)이 새로워지고, 명유(名儒)가 계속 나오매 학술이 비로소 밝아졌다. 우리 동방의 학문이 상전케 된 것을 차례로 말하면 , 정몽주가 우리나라의 성리학의 조상인데, 길재가 몽주에게 배웠고, 김숙자가 길재에게 배웠고, 김종직이 숙자에게 배웠고, 김굉필이 종직에게 배웠고, 조광조가 굉필에게 배우매, 자연히 연원의 정통이 있게 되었다. 이로부터 유사가 성현의 학문을 베풀게 되었다.”
고봉의 시대를 전후한 시기 조선의 성리학의 학맥을 정리해 보면 학통의 연원은 여말 선초 신흥 사대부들의 학통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참고 자료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선비」 정옥자 저. (현암사, 2003)
「조선시대 7인의 정치사상」 부남철 저. (사계절, 1996)
「고봉학과 21세기 한국유학의 과제」 고봉학술원 저. (보림, 2004)
「한국 중세 유교정치 이념사론」 김준석 저. (지식산업사,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