윈스턴 처칠의 리더십
- 최초 등록일
- 2008.07.11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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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윈스턴 처칠의 리더십에 대한 리포트입니다.
목차
1. 윈스턴 처칠의 성장과정
2. 윈스턴 처칠과 정치 입문의 실패사
3. 윈스턴 처칠의 예견력
4. 윈스턴 처칠과 챔벌린의 경쟁
본문내용
2. 윈스턴 처칠과 정치 입문의 실패사
처칠은 스물다섯 살 때 하원의원으로 당선된다. 그러나 곧 누구보다 많이 낙선한다. 보수당원이면서도 사회복지와 무역에 관해서는 진보주의의 자유당에 가까웠다. 노동자계급에 동정적이었다. 서민대책에 열심이었으며 값싼 식료품 공급을 위해 농산물 관세를 낮추자고 했다. 이렇게 해서 보수당과의 갈등이 커진 끝에 1904년 자유당으로 옮긴다. 자유당 내각에서 상무장관, 내무장관을 거쳐 1911년 해군장관이 된 처칠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맞는다. 1924년 자유당이 외교정책과 식민지 문제를 둘러싸고 자신과 다른 입장을 취하자 다시 보수당으로 돌아온다. 두 번째 당을 바꾼 것이다. 그러나 처칠은 보수당에서도 찬밥신세였다. ‘완고한 제국주의자’인 탓이 컸다.
술을 무척 좋아해 하루를 ‘위스키 소다’로 시작한 그는 자주 논리적 사고에 앞서 직관적으로 판단했다. 위인들에게서 흔히 보는 ‘본능의 힘’이다. 아이디어도 많았다. 탱크를 생각해 내고 로켓에 빠졌으며 적의 레이더를 혼란시킨다며 비행기에서 금속파편을 떨어뜨리기도 했다. 행동을 앞세우면서 문장을 즐겼던 처칠은 책을 쓴다는 것은 ‘편하고 즐거운 친구를 옆에 두는 격’이라고 했다. 글이 수수하면서도 힘과 멋이 있던 그는 평생 쉰여섯 권의 책을 냈다. 빈틈없는 채비로 명연설도 남겼다. 짧고 분명한 단어와 문장을 좋아하고 리듬을 중시했다. 길게 설명하는 대신, 비유로 의미를 압축해 전달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