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
- 최초 등록일
- 2008.07.04
- 최종 저작일
- 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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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호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
목차
1. 들어가며
2. 호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
1) 호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의 연구
① 호태왕비와 중원고구려비에 대한 소개
② 지금까지의 연구 성과
③ 밝혀지지 않은 점
3. 마치며
본문내용
광개토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획기적으로 확장한 왕이었다. 광개토왕은 392년 고구려의 제 19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재위 22년째 되던 413년에 돌아가셨고 호를 광개토왕(廣開土王)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런데 능비문에는 왕의 호칭이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으로 되어있고 재위 기간 중에는 영락(永樂)이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또한 왕의 재위 연대에 있어서는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과 능비문 사이에 조금 차이가 난다. 즉 비문에는 광개토왕의 즉위 원년을 391년 이라고 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보다 1년이 빠른 것이다 그리고 역시 능비문에는 돌아가신 연대를412년이라고 했으므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과 1년의 차이가 생긴다. 능비문이 당대의 자료라는 점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기록보다는 능비문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광개토왕릉비는 일본 측에 의해서 처음으로 비문의 내용이 세상에 공개되었다. 그러나 일본학계에서는 이 비문을 갖고 고대 한일관계사의 역사상을 꾸미는데 적극 활용해왔다. 뿐만 아니라 이는 근대일본의 한국 침략과 일본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역사적으로 정당화하는 구실을 제공하기 까지 했었다. 또한 최근에는 중국 측에서 동북공정을 시작하며 고구려의 역사를 왜곡하며,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통합시키려고 하고 있다.
장수왕은 부왕인 광개토왕 못지않게 고구려의 영토를 확장한 왕이다. 비록 북진과 남진이라는 대조적인 확장이었지만 영토를 확장한 것은 사실이었다. 장수왕은 광개토왕의 맏아들로 제 20대 고구려왕으로 즉위하였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남쪽으로 영토를 넓혀갔다. 중원고구려비는 고구려의 남진 경계비이다. 그 내용은 중원에서 고구려, 신라의 두 왕이 만나서 그 곳에 살던 신라인을 다른 곳으로 옮긴 후, 고구려 영토임을 확인하는 기념으로 세웠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한국사 시민강좌 3집 이기동 일조각
고대로부터의 통신 한국역사위원회고대사분과 푸른역사
한국고대정치사회사연구 이기백 일조각
광개토호태왕비연구100년 학연문화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