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왕국 이스라엘 - 오므리 왕조에 관하여
- 최초 등록일
- 2008.07.03
- 최종 저작일
- 20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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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북왕국 이스라엘 - 오므리 왕조에 관하여 쓴 레포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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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이 시대의 전체적인 내용
1. 오므리 왕조
2. 바알 신화
3. 오므리 왕가의 몰락
4. 결론: 오므리 왕조 시대를 바라보며
본문내용
이 시대의 전체적인 내용
이스라엘은 오므리 왕조와 등장하면서 이스라엘과 유다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찾아왔고 긴밀한 동맹관계가 이루어졌다. 오므리 왕조의 국제적인 활발한 외교와 도성과 성읍 건설(사마리아, 하솔, 므깃도 등)은 이스라엘의 위상을 높였고 경제적이고 문화적인 개방을 통해 솔로몬 시대에 누렸던 번영을 다시 누릴 수 있게 하였다. 오므리와 아합은 이스라엘과 유다 역사 속에서 성서 이외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헌과 유적들에서 언급된 최초의 인물들로서 앗시리아의 경우에는 오므리 왕조의 몰락 이후에도 이스라엘을 계속 ‘오므리의 집’이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오므리 왕조는 주변 국가 왕실들(페니키아, 유다)과의 정략적 혼인 관계를 통해 외교적인 동맹을 더욱 확고히 했고, 이스라엘 안에서 이방 신들을 위한 제의의 확립을 가능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왕실의 외교정책으로 인한 종교의 다양성은 무엇보다도 북왕국의 오므리 왕조 시대에 종교적이고, 정치적이면서 사회적인 갈등을 일으켰다. 오므리 왕조는 새롭게 형성한 강력한 중앙 정부 구조를 토대로 외교정치 무대에서 크게 성공을 거두고 국가를 부강하고 번영 시켜나갔지만, 그것은 전통적으로 지파동맹 전승과 야훼를 따르는 예언자 집단의 반발을 감수하면서 취한 정책이었다. 오므리 왕조가 추진했던 활발한 국제교역과 문화적 개방은 야훼 종교와 바알 종교가 공존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오므리 왕조는 배타적인 성격을 가진 야훼 종교를 고집하는 것은 외교적으로 큰 손실이며 주변국들과의 동맹에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오므리 왕조는 강제적으로 야훼 제의와 바알 종교를 혼합시키거나 결합하는 것을 추구하지는 않았고, 야훼 제의와 마찬가지로 바알 종교도 국가 제의로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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