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산리전쟁과 독립군의 배경
- 최초 등록일
- 2008.06.21
- 최종 저작일
- 2008.05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1920년대 무장투쟁의 배경 원천을 설명한 글
목차
없음
본문내용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점되기 전후하여 만주와 연해주에서 독립운동을 위한 독립군 기지건설이 전개되었다. 그중에서도 서간도의 신흥무관학교가 가장 널리 알려졌고 끊임없이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이러한 서간도에서의 독립군 기지건설운동에는 항일지사와 혁신 유림, 청년 학생, 이주민들의 헌신과 열정이 담겨있다.
서간도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은 일본의 군대나 경찰에 의한 위협이 적고 중국정부의 통치력도 약화되어 있던 지역이라는 점에서 이점을 지니고 있었으나 북간도나 만주지역보다도 더 추운 지역이었고 수토가 맞지 않아 풍토병에 시달렸으며 마적에 습격을 받기도 하였다. 가장 어려운 점은 현지 중국인들의 의심과 냉대라는 많은 악조건 속에서 건립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이러한 점 말고도 무관학교를 세우고 운영하려면 많은 비용이 필요로 했는데, 이 점에서 독립운동기지건설에 많은 재산을 서슴지 않고 제공한 이석영과 이희영 6형제들의 공로는 특별하다고 할 수 있다. 그 밖에도 많은 사람들이 무관학교를 키우기 위하여 헌신적으로 활동하여 서간도의 독립운동기지건설은 성과를 거두었고 조국 독립의 의지를 가진 많은 젊은이들이 신흥무관학교를 찾아 이후의 독립운동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렇게 서간도 지역의 독립운동 및 독립운동기지건설이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신흥 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운동기지건설이 유기적으로 잘 이루어졌다는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경학사, 부민단, 한족회 등의 단체는 주민자치와 실업과 교육을 진작시키기 위한 역할을 충실히 하였고, 특히 부민단은 6천명 이상의 한국인을 관장하여 보호하고 행정사무뿐만 아니라 상호간의 사고를 사법처리까지 한 명실상부한 자치기관이었다. 그와 함께 고국에서 오는 동포를 맞이하여 살게 해주고 중국의 관민으로부터 한국인의 권리도 지키는 등의 많은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부민단 등의 활동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으로 구성된 신흥학우단에 의해 주도적으로 활동이 이루어졌다.
참고 자료
청산리전쟁과 독립군의 배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