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게바라
- 최초 등록일
- 2008.06.10
- 최종 저작일
- 20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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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나의 삶
내 나이 열다섯 살 때,
나는
무엇을 위해 죽어야 하는가를 놓고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그 죽음조차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하나의 이상을 찾게 된다면,
나는 비로소 기꺼이 목숨을 바칠 것을 결심했다.
먼저 나는
가장 품위 있게 죽을 수 있는 방법부터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모든 것을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문득,
잭 런던이 쓴 옛날이야기가 떠올랐다.
죽음에 임박한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차가운 알래스카의 황야 같은 곳에서
혼자 나무에 기댄 채
외로이 죽어가기로 결심한다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내가 생각한 유일한 죽음의 모습이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에르네스토 게바라 데 라 세르나’는 당시 라틴아메리카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농민출신도 아니며 당시 막 형성되고 있었던 노동자출신도 아니다. 그는 `부르주아`가족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의 여행을 통해, 라틴아메리카의 원주민과 대다수 사람들의 생활을 목격하고, 아름다운 대자연과 호흡했던 것이다. 그렇게 넓은 라틴아메리카 대륙의 구석구석을 쉴 새 없이 돌아다녔다. 그는 라틴아메리카를 사랑했고, 라틴아메리카 사람들을 사랑했다. 사랑은 그로 하여금 총을 들고 싸우게 한다. ‘우리에게 한 자루의 총을, 우리에게 뜨거운 사랑을’ 게바라는 늘 이렇게 외치고 다녔다. 여행을 마치고 아르헨티나로 돌아와 의과대학을 졸업한 뒤, 체 게바라는 1955년 쿠바의 혁명가 피델 카스트로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의 오른팔로서 쿠바 혁명을 위해 게릴라 투쟁에 뛰어든 그는 마침내 1959년 바티스타 정권을 몰아내고 정치가 겸 행정가로 탈바꿈한다. 혁명 정부의 중앙은행 총재, 산업장관, 전권대사를 지내던 그는 1965년에 카스트로와 헤어진 후 볼리비아 혁명을 위해 다시 밀림으로 들어가 게릴라를 이끈다. 그곳에서 1967년 미국 CIA를 등에 업은 볼리비아 정부군에 붙잡혀 총살 된다.
체 게바라의 일생을 면밀히 추적하면서 장 코르미에가 거듭 부각시키는 것은 체의 인간적이고도 다면적인 면모다. 진보적인 생각을 지녔던 부모 밑에서 자란 게바라는 어린 나이에 벌써 정치적인 견해를 내보였다. 또한 그는 지칠 줄 모르는 활동성을 가지고 있었다. 천식의 발작이 올 때마다 죽음의 문턱을 보았기 때문이었는지 그는 삶을 ‘다른 사람의 두 배, 세 배로 농축해’ 살았다. 운동은 그를 매료시켰다. 특히 럭비를 좋아했는데, 이때의 운동이 나중에 시에라마 에스트라에서 그 혹독한 싸움을 이겨낼 수 있도록 해주었다고 한다. 이런 활동성은 육체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그는 책을 놓지 않는 독서광이었고 끝없이 공부하는 사람이었다. 전투를 하는 와중에도 늘 책을 갖고 다녔다. 그는 게릴라의 대부분이 문맹자라는 사실에 대해 "글자를 모르면 왜 총을 잡는지도 이해하지 못한다."고 주장하며 학교를 만든다. 그는 시에라마 에스트라 산맥의 전장에서 게릴라들을 이끄는 지도자였고, 전투가 끝나면 부상병을 치료하는 군의관이었으며, 문맹의 농민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혁명정신을 일깨우는 교사였다. 게바라에게 있어 학교는 그 어떤 요새보다 중요하다. 그는 시가를 달라고 요구하는 문맹 게릴라들에게 `서면`으로 요구하라고 말한다. 문맹 게릴라는 결국 담배를 피우기 위해 글을 배워야 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프로이트의 책을 늘 갖고 다녔으며, 키에르 케고르, 칼 야스퍼스, 하이데거 등의 실존 철학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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