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조영이 세운 발해
- 최초 등록일
- 2008.05.23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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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사학-발해(진국)에 대하여
목차
1.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진국(震國)
2. 무왕(武王)과 문왕(文王)
3. 사회계급과 관제
4. 海東의 盛國
본문내용
고구려 유민(遺民)이 세운 나라 발해(渤海)
1. 대조영(大祚榮)이 세운 진국(震國)
고구려가 나(羅)당(唐) 두 나라의 협격 작전을 막아내지 못하여 평양성이 함락되고 700년 사직이 무너졌지만, 만주 각지에는 항복하지 않은 고구려의 성진(城鎭)들이 많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는 고구려를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이에 고구려의 유민(遺民)들은 고구려가 망한 지 31년 뒤인 AD 699년 진국이라는 새로운 나라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진국이라는 나라 이름은 20년 뒤인 제2대 무왕 때 발해(渤海)로 바뀌었는데, 이때부터 사람들은 나라 이름을 발해라고 불렀다.
발해는 고구려 유민이 세운 나라인데도 불구하고 중화사상에 취해 있는 중국의 학자들은 발해국을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세운 나라라느니 혹은 당나라의 예속 국이었다느니 하며 발해국을 비하해 왔다. 일본인 사학자들 사이에서도 발해국은 말갈족이 창건하였다느니 혹은 고구려 족이 창건했지만 부중의 대다수가 말갈족이었다느니 하며 시각차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발해국을 세운 대조영(大祚榮)은 고구려 사람이 틀림없으며, 발해의 지배계급도 고구려 사람들이 틀림없으므로 발해사는 고구려사의 연장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속일본서기(續日本書紀)》권22 에 기록된 발해의 제2대 무왕이 일본 세이무(聖武) 천황에 보낸 국서에서 “고(구)려의 구거(舊居)를 복구하고 부여의 옛 풍속이 있다.”라고 하였고, 제3대 문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도 자신을 ‘고구려왕 대흠무(大欽茂)’ 라고 말하였고, 일본 정부가 발해왕에게 보낸 국서에서 “삼가 고려왕에게 묻습니다.”라고 쓴 것을 보아도 발해는 고구려의 맥을 이은 나라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 사람들은 《구당서(舊唐書)》에 기록된 ‘대조영이 고구려의 별종(別種)’이라는 구절을 두고 대조영이 고구려 사람이 아닌 다른 민족이라고 해석하면서 고구려와 발해가 민족적으로 무관한 것처럼 발해를 비하하려고 애를 써왔다. 그렇지만 같은 《구당서》에 ‘고구려족은 부여의 별종’이라고 기록되었다고 해서 고구려족과 부여족이 다른 족속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