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연극사의 신극
- 최초 등록일
- 2008.05.04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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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 연극사 중 신극의 역사와 그 의의
목차
1. 신극, 리얼리즘, 사실극
1)서구의 번역극 수용
2) 표현주의 공연에 대한 혹평
3) 창작극의 긍정적 평가
4) 신극의 통속화
5) 학생극
6) 동경학예좌
2. 사실주의의 발아
1) 조명희의 <김영일의 사>
2) 토월회의 번역극
3) 사실극의 개척자, 김우진
4) 홍해성의 연출수업
3. 신극의 특성
1) 사실주의 양식의 지향
2) 농촌극
3) 교화적 계몽의 태도
4) 개성적 성격의 창조
5) 대결의 부재와 출구의 모색
6) 통속성과의 타협
4. 사실주의의 확대
5. 의의
본문내용
1. 신극, 리얼리즘, 사실극
창극과 신파조극이 대중 속으로 확산될 무렵, 한편에서는 신극을 수립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3·1운동이 그 결정적인 촉매 역할을 했다. 만세운동을 통해 표출된 성숙한 근대적 의식은 이를 온전히 담아낼 수 있는 보다 성숙한 연극적 양식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10년대 후반부터 ‘신극(新劇)’이라는 용어가 자주 등장하기 시작한다. 넓은 의미에서 당시의 신극은 새로운 연극, 즉 기존의 구파극이나 신파극에 대응하여 보다 혁신적인 연극이라는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그런 점에서 앞선 시기에 사용된 ‘신연극’이라는 용어의 연장(延長)으로 볼 수 있다. 좁은 의미에서는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국내에 소개된 입센 이후의 서구 근대극을 지칭했다.
이후 유학생 그룹을 중심으로 연극운동이 확산됨에 따라 신극이라는 용어가 정착되었다. 당시에는 일본에서 사용되는 용어를 그대로 빌어 신극이라 칭하였고, 후대의 연극사가들 역시 이 용어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러한 용어 사용은 신극이 곧 서구의 근대극 개념과 동의어라는 인식에 근거해 있다.
1920년대에 ‘토월회’의 연극에서 싹을 보였던 신극운동은 1930년대에 들어서 ‘극예술연구회’(약칭 극연)의 창립과 더불어 본격화되기 시작한다.
‘극연’은 1931년 6월18일부터 24일까지 ‘극영동호회’ 주최-동아일보사 후원으로 열렸던 ‘연극영화전람회’를 모태로 탄생되었다. 당시 동아일보 학예부 기자였던 서항석은 작가 윤백남의 소개로 일본 축지소극장에서 수업하고 돌아온 홍해성을 알게 되었고, 연극에의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한 채 불우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그를 돕기 위해 전람회를 계획하였다.
그런데 주최자가 마땅치 않기로 형식을 갖추기 의해 서항석이 ‘극영동호회’란 단체명을 임의로 지은 것이다. 이 전람회를 계기로 뜻을 같이 한 사람들이 모여 ‘극연’을 조직하게 된다.
1) 서구의 번역극 수용
극이 없는 사회에서 극을 있게-극문화를 세워 볼까 하는데서 극을 가진 나라에서 극을 가져 와야 하겠다는 것이다.
참고 자료
서연호, 연극과 인간, <한국연극사-근대편> 2000.2
김미도, 현대미학사, <한국 근대극의 재조명> 1995.1.
서연호, 연극과 인간, <한국연극의 쟁점과 새로운 탐구> 2001.4
유민영, 태학사, <한국 연극 운동사> 20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