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간섭기의고려,과연이민족의꼭두각시였는가
- 최초 등록일
- 2008.04.29
- 최종 저작일
- 20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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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본고는 한국 중세사의 탐구 시간에 본인이 직접 작성한 레포트이다. 여러가지 저서를 참고했지만, 참고자료 목록은 밝히지 않겠으며 도서를 꼼꼼히 읽고 필요한 부분만을 추려내어 본인의 생각과 함께 제시하였다. 원간섭기의 고려가 과연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하고 원나라에 복속되었는지 살펴보고, 고려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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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고려 왕조 500년을 살펴보면 사회 제반 문제에 있어서 많은 굴곡이 존재했던 것 같다. 고려 전기의 문벌․귀족 사회가 빚어낸 모순과 이에 불만을 터뜨린 무신정권의 성립, 그리고 외세의 예속적 압박은 앞서 말한 굴곡의 큰 토막으로 상정해 볼 수 있겠다. 건국 초기에는 분명 왕권강화의 진전과 사회구조의 체계적인 조직 등 국가를 운영할 수 있는 체제를 마련했으나, 소수 지배층 간의 내분 및 외부와의 항전으로 인해 국력이 소실되었다. 이후에 빚어진 혼란한 시대상은, 더 이상 ‘고려적’인 모습을 나타내지 못했다. 나는 특히 원 간섭기의 중세사회에 초점을 맞춰서 정치적․경제적으로 어떠한 시련을 겪었으며, 고려 국왕이 몽고의 수중(手中)에서 놀아났다는 일반적 시각이 과연 합당한 근거를 갖는 것인지 확인해 볼 필요성을 느꼈다.
원 간섭기는 대체로 충렬왕 대 부터 공민왕 대 이전까지라고 하지만, 공민왕 재위 초기까지도 원의 영향력이 잔존한 상태였다. 뒤에 언급하겠지만, 중국과의 조공제도는 약 2000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고려를 간접지배하면서 무리한 조건을 내걸기도 했다. 한편 몽고와 고려가 처음으로 마주치게 된 것은, 몽고가 거란을 격퇴하기 위해서 고려로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된다. 의도한 바가 겉으로 드러난 것은 아니지만, 표면상 거란을 굴복시키려는 몽고가 고려에 갑작스런 조공을 요구했던 점은 의심해 볼 만 하다. 물론 고려의 입장에서는 당시의 문젯거리였던 강동성의 거란을,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물리칠 수 있다는 계산을 일찌감치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 후로 몽고의 사신이 고려에 조공요청을 수행하러 온 횟수가 점차 늘어갔고, 결국 동아시아의 대제국 앞에서는 손쓸 여력이 없었다. 단, 조공은 허락하되 고려에 오고가는 몽고 사신은 냉대받기 일쑤였다. 하지만 몽고에 적대감을 가졌던 여진족의 소행으로 말미암아, 고려가 몽고 사신 ‘저고여’를 피살했다는 누명을 쓰게 되었다. 고려는 적극 부인했으나 평소에 우호적
이지 않았던 그들을 몽고가 쉽게 놓아줄 리가 없었다. 결국 몽고는 1231년 1차 침입을 시작으로 하여 42년 간 11차례나 고려의 국경을 넘어왔다. 고려는 이에 적극적으로 대항하여 3차례를 물리쳤지만, 그 이전부터 사회모순이 심각한 수준이었기 때문에 결코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막아낼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몽고와의 화의성립과 함께 고려는 사실상 원의 속국신세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
(후략)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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