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기사를 통해 본 선사시대
- 최초 등록일
- 2008.04.11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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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선사시대를 언론기사를 통해 조명해본 글!!
목차
“고인돌 앞에 서면 시간도 멎어”
청동기 시대 토광묘 집단 발굴
대구서 청동기시대 석곽묘 무더기 확인
청동기시대 대형 집단묘 김해서 확인
정선 고인돌서 발견된 유골 백인 추정
"한탄강 댐 예정지, 반달 돌칼 발견"
“고인돌도 보고, 선사체험도 하고”
본문내용
◎최근 기사로 본 선사시대
청동기 시대의 네비게이션 고인돌
“고인돌 앞에 서면 시간도 멎어”
“청동기시대 무덤인 고인돌은 단순한 돌이 아니라 우리 역사와 조상의 숨결이 담겨져 있는 문화유산입니다. 기괴한 모양의 수석 을 좋아해 자연을 해치는 사람이 많은데 그보다는 우리 조상의 피와 숨결이 흐르는 고인돌을 찾아 우리 국토와 민족에 대한 사 랑을 느끼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 힘쓰면 자연보호도 함께 돼 일 석이조가 아니겠습니까.” 한양대 법대 유인학(64·세계거석문화협회 총재) 교수는 최근 10 여년간 고인돌에 미쳤다는 말을 들으며 지냈다. 그것도 단순히 보고 즐기는 마니아의 차원을 뛰어넘어 보존운동을 전개하고 세 계거석문화협회를 만들어 지난 2000년 11월 호주 케언스에서 열 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고창·화순·강화의 고인돌의 세계문화유산 지정까지 이끌어냈다. 특히 이 기간이 유 교수가 대학 강단을 떠나 13, 14대 국회의원(88~96년)과 한국조폐공사 사 장(99~2002년) 등을 맡아 매우 분주했던 시절이란 점을 감안하면 유 교수의 고인돌 사랑은 단순한 여가의 차원이 아니라 숙명적 인 만남처럼 보인다. 유 교수 등의 노력으로 보기에 따라 무게만 수백t이 나갈 뿐 쓸모없어 보이는 큰 돌에 불과했던, 따라서 농 지정리나 도로공사 때면 어김없이 파헤쳐져 훼손됐던 고인돌이 한국을 대표하는 문화유산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됐다.
한양대 법대에서 법제사를 강의해 비교적 역사에 관심이 많았던 유 교수지만 고인돌 등 한·일고대사에 본격적인 관심을 갖게 된 것은 13대 국회의원이던 지난 89년 11월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왕인제’와 ‘시텐노지(四天王寺) 왓쇼이’ 행사를 목격하게 되면서부터다. 특히 같은 해 12월 원광대 마한백제문화연구소 주 최로 ‘한국 남해안(마한)지역 고대문화’를 다룬 세미나에 참석 한 김병모 한양대 박물관장(현 한국전통문화학교총장)과 임효재 서울대 교수 등이 한반도 남부와 일본 규슈(九州)지역의 문화적 공통점으로 청동기시대 고인돌과 고분문화를 드는 것을 보고 고 인돌 등 선사문화에 눈을 떴다. “당시 전세계적으로 유네스코가 인정하는 고인돌이 6만5000여개 정도 있는데 그중 남한에 2만50 00여개가 있고, 또 이중 1만9000여개가 전라도에 있다는 말을 들 었어요. 마한·진한·변한 등 잃어버린 삼한의 역사를 찾는데 고 인돌이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이를 보존·연구·활용하 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참고 자료
고인돌 사랑회
인터넷 백과사전
문화재청 고인돌 유적
네이버 / 야후 인터넷 포털 뉴스 검색
문화일보 2006년 06월 12일자 (도입부 인용을 위해 사용)
연합뉴스 2006년 11월 15일자 (대구시 청동기시대 석곽묘 무더기 확인)
연합뉴스 2006년 04월 06일자 (청동기시대 대형 집단묘 기해서 확인)
YTN뉴스 2007년 03월 09일자 (청동기시대 토광묘 집단 발굴)
서울신문 2006년 12월 06일자 (정선 고인돌서 발견된 유골 백인 추정)
조선일보 2006년 06월 30일자 (고인돌도 보고 선사체험도 하고)
뉴시스 2007년 02월 26일자 (한탄강 댐 예정지, 반달돌칼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