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원 이광수의 친일행위 고찰
- 최초 등록일
- 2008.04.05
- 최종 저작일
- 20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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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춘원 이광수의 친일행위에 관한 고찰 내용입니다.
목차
1. 서론
2. 춘원의 시대별 역사인식
1) 1910년대
2) 1920년대
3) 만주사변 이후
4) 중일전쟁 이후
3. 춘원의 친일행각에 관한 고찰
4. 친일문학의 의미
5. 결론
참고문헌
본문내용
2. 춘원의 시대별 역사인식
1) 1910년대 : ‘근대화 = 일본식 근대화’ 논리의 형성
이광수는 경제, 정치, 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이미 발전을 이룬 일본에 대해 찬탄하면서 그에 비해 아직 발전을 이루지 못한 조선의 현실에 대해 부끄러워하고 있었다. 발전한 일본과 발전하지 못한 조선의 대비는 이후 이광수의 인식을 규정하는 기본적인 틀이 되었다.
이광수가 근대를 인식하게 된 가장 중요한 계기는 일본 유학이었다. 이광수는 1905년 처음 도일했다. 그 뒤 1907년과 1915년에도 일본 유학의 길에 오른 바 있으므로 모두 세 차례에 걸쳐 일본 유학을 한 셈이다. 이 시기의 일본 체험 특히 세 번째의 일본 유학 경험은 이후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이광수는 세 번째 유학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 가려고, 미국 가서 공부하려고. 그때 소문에 미국은 문명했고 자유의 나라고 또 돈 없이도 공부할 수 있다기에 미국행을 열망”했지만 ‘미국행’이 좌절된 이후 세 번째 ‘일본행’을 통해 ‘문명과 자유’를 배울 수 있는 실질적 대상으로서의 일본에 본격적으로 주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이광수가 젊은 시절에 체험한 일본은 서구적 근대를 일찍이 달성한 나라, 따라서 양육강식이라는 근대주의 논리에 따라 약한 조선을 식민지화하는 것이 당연할 정도의 힘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심지어 정한론을 주장한 바 있던 후쿠자와 유키치에 대해서조차 서구 문명을 받아 들여 일본의 구사상, 구제도를 타파하는 데 공헌한 인물로 묘사할 정도로 이광수는 일본의 힘에 압도되고 있었다.
원래 근대 문물이 발달한 사회는 서구였다. 그러나 이광수는 이를 자신이 체험한 일본으로 치환했다. 서구가 아니라 일본과의 접촉을 통해 일본화된 근대를 인식했던 것이다. 명치유신 이후 문명 개화, 식산 흥업에 성공한 일본은 하나의 훌륭한 모델이었다. 이 시기 이광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문명 개화였다. 그리고 그 표준은 일본이었다.
참고 자료
『한국문학사』, 김윤식, 김현, 민음사, 1996
『이광수 전집』, 삼중당, 1962
『이광수와 그의 시대』, 김윤식, 솔
『제국 권력에의 야망과 반감 사이에서』, 최주한, 소명출판, 2005
『교과서와 친일문학』, 동녘, 1988.